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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려진 슬픔에의 답장(答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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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출가 김휘진
2021 예술로 기획사업, 리더 예술인


요즘은 편지를 잘 쓰지 않는다.
말에 담긴 마음은 휴대폰을 통해 짧게, 경제적으로 오고 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야기는 편지로만 전할 수 있다.

올해 ‘예술인 파견 지원사업1)’은 5인의 예술인2)이 한국마약퇴치운동본부와 함께 프로젝트를 진행했는데 요약하자면, 예술인-마약 중독자 가족 간의 서신 교환이었다.

우리는 이 프로젝트를 통해 편지에만 담을 수 있는 마약 중독자 가족의 이야기를 풀어보고자 한다.

지난 5월, 중독자 가족과의 첫 대면을 더듬어보면 또렷이 기억나는 순간이 있다.

약물의 남용으로 곤란에 처한 이의 부모님이 이제는 본인의 자녀가 학원에 등록해 취미 활동을 하는 등 극복의 의지를 보인다는 희망적인 이야기를 이어나갈 즈음이었다.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다른 이의 부모님이 대뜸 “학원비를 내지 않고 약을 사는데 쓴 건 아닌지 확인해 보셨어요?”라고 말씀하셨고 가족 모임의 공간은 일순간 차갑게 얼어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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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에 대한 끝없는 의심

그것은 슬픔의 누적이었고, 흡사 마약이 지닌 비극의 더께처럼 보였다. 우린 그 슬픔에 그만 주눅이 들고 말았다.

예술이 어떻게 이들을 도울 수 있을지 막막해지던 순간, 다른 한편으로는 슬픔이 너무나 선명해서 그것을 진지하게 마주하고자 하는 의지가 생겼다.

우리가 만난 마약중독자 가족들은 말이 없었다. 본인의 잘못도 아닌데 가족이 마약을 했다는 이유로 주변과도 소통이 단절된다고들 한다. 이렇듯 마약중독자 가족의 슬픔은 보통 가려지게 된다. 하지만 한 번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하면 멈추기 힘들 정도로 소통에 대한 의지 역시 강하다. 눈을 맞추며 진심으로 경청하다보면 시간은 한 시간을 훌쩍 넘길 때도 있다. 그들에게는 중독자 가족 모임을 제외하면 ‘마약으로 인한 슬픔을 이야기할 곳이 없다’는 호소가 들리는 듯 했다.

한국마약퇴치운동본부 중독재활센터 4층엔 우리가 가족모임의 순간을 그림으로 작업한 나눔엽서가 비치되어 있다.

중독자 가족을 포함해 누구든 이곳을 방문해 엽서를 적으면 예술인의 답장을 받아볼 수 있도록 안내문도 붙여두었는데 마약 중독 치유와 예방의 전문가가 아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슬픔에의 위로와 공감, 정서적 지지 정도 일 것이다.

엽서를 제작하는 동안 무엇보다 가족모임을 특별한 순간으로 기념해 드리고 싶었다. 힘들게 걸음 하신 가족모임의 순간순간이 중독자를 인내하며 기다리는 지난한 과정의 밑거름이 되어 결국엔 치유라는 꽃을 피우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이러한 우리의 마음이 담긴 예술 활동이 가족 모임 활성화에 조금이나마 밑거름이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쁠 것이다.

익명의 엽서 속 사연은 슬픔을 뭉뚱그리지 않는다. 제각각의 필체는 제각각의 슬픔을 대변한다.

엽서의 내용에는 공통적으로 중독자를 위해 마음을 다잡는다는 가족의 각오가 빠지지 않는다. 또한 중독자의 회복을 위해선 가족의 믿음이 절대적이라는 말에 힘을 내다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 여정에 지친 모습 역시 행간에 읽히기도 한다.

좀처럼 펜을 쓸 일이 없는 요즘, 손이 저리게 답장을 쓰노라면 손편지가 가진 힘을 새삼 깨닫게 된다.

손으로 그들의 사연에 공감과 위로를 담는 동안에도 마약의 위해는 엄중하게 다가온다.

답장을 쓰는 횟수가 거듭 될수록 서로의 처지를 나누며 정서적 지구력을 유지할 수 있는 가족 모임의 필요성이 더욱더 절실히 다가온다.

그동안 답장을 쓰면서 중독자 가족들이 우리에게 해준 일에 대해 얘기할 기회가 없었다. 그들의 슬픔에 귀 기울이는 동안 우리의 내면에는 어떠한 변화가 생겼다.

우리는 일상을 조금 더 소중하게 생각할 기회를 갖게 되었고, 그 변화를 예술적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동기를 통해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 수 있었다.

‘도담도담 라디오’라 이름을 붙인 이 이야기에는 ‘중독자 가족이 시작한 여행’에 관한 사연을 담았다.

그 이야기에 대한 반응은 제각각일 테지만 진실성에 대해선 모두가 공감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건 다름 아닌 당신들의 가려진 슬픔을 우리가 볼 수 있도록 허락해주었고 우리가 중독자 가족들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예술을 수단 삼아 받아 적고 느낀 바를 덧붙였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도담도담 라디오’는 중독자 가족들이 창작한 이야기임과 동시에 예술인이 보내는 그들에게 보내는 궁극적인 답장이기도 하다.

모두가 함께 적어나간 이 이야기가 중독자 가족에게 따뜻한 온기로 전해지길 진심으로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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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담도담 라디오’의 전체 내용은 한국마약퇴치운동본부 유튜브 채널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접속 주소는 QR코드 또는 아래 주소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접속 주소 https://youtu.be/dA0pdOGZ9vI


1) 예술인 파견 지원사업은 한국예술인복지재단(문화체육관광부 산하)에서 2014년부터 8년째 수행하고 있는 사업으로 예술인의 예술적 역량과 경험을 토대로 참여기관의 이슈를 진단하고 예술적 협업 프로젝트를 기획, 운영함으로써 사회적 가치를 확장, 도모하기 위해 추진하고 있는 사업임.
2) 연극연출가(극작가) 김휘진(리더예술인)을 필두로 신동준(배우), 이아름(배우), 이혜현(일러스트레이터), 최샘이(기획)가 참여예술인으로 프로젝트에 참여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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