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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가니스탄 전쟁이
마약과의 전쟁이라고요?

아프가니스탄(아프간), 헤로인, 그리고 미국 정부의 마약 밀매 지원

아프가니스탄은 의심할 여지없이 세계에서 가장 큰 양귀비(Opium Poppies) 생산국이다. 양귀비는 고무(gum) 제공도 하며 헤로인 생산까지 귀결된다. 그러면 여러 가지로 문제가 있는 나라가 어떻게 세계 헤로인의 대부분을 공급할 수 있었을까? 이를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프가니스탄의 최근 역사뿐만 아니라 서구 식민지 강대국들이 어떻게 이 나라에 관여해 왔는지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르네상스 시대 이후 모든 제국들(empires)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등- 은 그들의 글로벌 영역 팽창을 위한 주요 자금원으로 마약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근대에 미국의 해외 팽창주의는 에너지 확보와 관련된 것으로 보이며 미국은 그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세계 각 지역의 마약밀매상으로부터 주요 자금을 확보해왔다.

한국에서의 군사 작전이 종료된 이래로 미국은 제3세계의 4개 주요 해외 분쟁에 연루되어 왔다: 베트남 (1961년-1975년), 페르시아만 (1990년-1991년), 콜롬비아 (1991년-현재), 아프가니스탄 (2001년-2021년) 등.

각 전쟁은 주요 산유국 간 또는 그 근처에서 일어났고, 각각의 경우에 미국은 국제 마약 밀매상들과 협력하고 의존했다. 이러한 마약 밀매 파트너들과 협력하고 지지하는 패턴은 1945년 이후 전 세계 마약 사용이 증가되는데 주요한 기여 요인이 되었다.

이러한 마약 밀매상들은 미군의 작전 수행에 고용되거나 혹은 미군을 대신하는 역할에 활용되어 왔다.

아이러니하게도, 마약 밀매를 지원하게 됨에 따라 미국은 본의 아니게 자금세탁, 인신매매 등에도 기여하게 되었으며 마약 밀매 자체는 전 세계 테러리즘 자금사용의 원천이 되었고 결과적으로 테러의 대상이 미국을 비롯한 동맹국들에게로 귀결이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위험성들은 에너지와 석유 비축량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감수할 만한 가치의 당위성이 있다고 판단되었다.

코소보 분쟁(1998-1999)을 생각해 보자. 코소보 해방군(KLA)이라는 이름의 소수 민족인 알바니아인들을 유고슬라비아가 공격함으로 인해 시작되었다.

1998년에 미국이 개입했고 그다음 해에 미국은 나토 동맹국들이 유고슬라비아 군대를 코소보에서 철수하도록 촉구하는 폭격 시위를 벌이도록 이끌게 된다.

그러나 1998년 미 국무부는 코소보 해방군이 오사마 빈 라덴으로 알려진 테러리스트들의 지원과 국제 헤로인 거래를 통해 자금이 조달되었다고 주장하며 코소보 해방군을 국제 테러 조직으로 낙인찍었다.

흥미롭게도 미국의 개입은 그 지역이 카스피해로부터 석유를 운반하는 서방 측의 송유관 경로가 되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따라왔다.

1998년 11월 빌 리처드슨 당시 미국 에너지 장관은 카스피해로부터의 석유 추출과 운송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것은 미국의 에너지 안보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는 카스피해 연안에 상당한 정치적 투자를 했고, 이 지역에서 우리에게 송유관 연결과 정치적 측면이 올바로 자리 잡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당시 KLA에 대한 지원이 송유관에 연결되었다는 주장은 조롱거리가 되었지만, 오늘날 트랜스 발칸 파이프라인(터키와 우크라이나 사이 천연가스 송유관)은 현실이 되었다. 비록 이 송유관이 코소보를 통과하지는 않지만, 알바니아를 거쳐 아드리아해의 블로르 항구로 간다. 이러한 송유관이 가진 문제를 해소하기 위하여 알바니아 지도부는 1998년 12월 불가리아 소피아에서 열린 전략회의에서 코소보 문제를 해결해 주도록 요구했다. 그리고 1999년 3월 나토군은 유고슬라비아를 공격했다.

1979년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의 무자헤딘 전사들에게 무기를 공급하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공산주의인 아프가니스탄 민주 공화국 정부에 맞서 싸우고 있었다.

이들 중 한 명은 굴부딘 헤크마티아르로, 그는 자신의 헤로인 정제소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마약 밀매상이었다.

1979년 이전까지 미국으로 공급되는 헤로인은 주로 터키에서 비롯되었으며 아프가니스탄에서 나온 헤로인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1980년에 아프가니스탄은 60%를 공급하게 되었다.

1979년 아프간 정부 측을 지원하기 위한 러시아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은 중동 유전에서 러시아의 영향력 확대에 대한 미국의 우려를 증폭시켰으며 나아가 당시 이란 혁명의 문제로까지 확대되었다.

러시아의 아프가니스탄 주둔은 미국 경제의 생명선이 되는 석유 매장량을 보유하고 있는 아라비아해의 500km 이내에 러시아가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미국은 걸프 지역에서 병력을 증강했는데 이는 미국에 우호적이었던 이란의 팔라비왕(Shah of Iran)이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에 의해 몰락했음과 1971년 영국군이 걸프 지역에서 철수하면서 야기된 힘의 공백을 메우기 위함이었다.

사실 1979년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에 개입한 것은 러시아를 이길 수 없는 분쟁으로 유인하고 미국 소유로 여겨진 베트남을 줌으로써 본질적으로 소련 연방(the Soviet Union)을 약화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이것은 마약의 유통 흐름을 통제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목표로 여겨졌다.

러시아의 침략 이후 양귀비 재배는 꾸준히 증가했다. 여기에는 많은 요인들이 있었다. 당시 뉴욕타임스 보도에 따르면, 아편은 0.5킬로당 50달러에 팔렸으며 정부의 농경지 파괴 정책으로 빈곤해진 러시아 농민들은 생산량을 늘려나갔다.

1980년대 중반 아프가니스탄의 양귀비 생산량은 140미터톤(metric ton)에서 400미터톤으로 증가했다. 1987년까지 다시 두 배로 증가했다.

양귀비 재배 농부들이 그들의 수확물과 운송 활동을 보호하기 위해 무자헤딘 전사들을 고용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으며 무자헤딘 전사들은 미국의 지원을 받았다.

1980년대 중반의 수확물 대부분은 파키스탄의 정제 공장에서 가공되었으며 약 80억 달러 정도의 지하 경제를 양성했다.

동시에 파키스탄의 헤로인 중독자 수는 1979년 2명에서 1988년 말까지 약 170만 명으로 증가했다. 오늘날에는 중독자 수가 약 700만 명에 이른다.

아이러니하게도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의 국경을 넘나드는 대규모의 마약 밀매는 본질적으로 파키스탄의 정보기관인 ISI의 지원 없이는 성공할 수 없었는데 ISI는 당시 미국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는 것이다.

유럽 사법 기관들은 파키스탄이 헤로인 무역에 관여하는 것을 염려하게 되었으며 전 세계 헤로인의 70%가 파키스탄을 통해 유입됨에 따라 파키스탄을 마약을 유통하는 마약 국가(narco-state)로 간주하기 시작했다.

1986년에 두 명의 파키스탄 군 장교가 220kg의 고농도 헤로인을 운반하다가 체포되었다. 군부대는 재빨리 그들을 경찰 유치장에서 풀어줬고, 그들은 조사가 시작되기 전에 “도피”했다. 미국은 이 사건을 인지하고 있었으나 미국에게는 아프가니스탄에서 러시아를 물리치는 것이 훨씬 더 큰 목표였다.

1989년 러시아가 아프가니스탄을 떠났을 때 미국의 자금 지원도 중단되었으며 러시아와 친러 정부에 대항하여 싸워온 다양한 파벌들 사이에 내전으로 이어졌다.

자금 확보의 유일한 원천은 아편이었고, 여러 세력들이 도로에 차단막을 설치하여 아편 생산자들로부터 세금을 거두었다. 이런 혼란 속에서 1994년 탈레반이 무자헤딘의 폭력으로부터 마을 사람들을 가장 잘 보호할 세력으로 부상했다.

비록 탈레반 세력들이 헤로인 거래를 중단한다고 많은 서약을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탈레반은 종교적 이념 측면은 줄어들고 마약 거래를 통한 자신들의 정권에 자금을 대는 방식으로 기운 것으로 즉각 파악되었다. 이는 국가가 달리 지원해 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아편의 소비와 헤로인 제조는 금지했지만, 아편의 생산과 거래만은 허용했다.

따라서 아편의 생산, 경작, 유통 등 각 단계마다의 세금부과는 탈레반에게 연간 약 12억 5천만 달러의 자금을 제공했던 것으로 유엔은 밝히고 있다. 탈레반은 유엔의 제재 아래 계속 투쟁하면서 제재 해제와 국제적 인정 획득을 원했다. 2000년 가을 모내기 시즌이 다가오면서 탈레반 지도자 물라 오마르는 양귀비 재배를 불법화했고 재배자들은 이제 엄중한 처벌을 받게 된다고 밝혔다. 2001년 봄까지 인공위성 사진에는 단지 8,000 헥타르만 경작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는데, 이는 전년도의 82,000 헥타르보다 대폭 줄어든 것이었다.

그 8,000 헥타르의 대부분도 탈레반이 통제하지 않는 지역에서 경작했던 것이었으며 양귀비 재배 금지는 많은 농부들을 극심한 빈곤으로 몰아넣었고 헤로인 가격을 올렸다. 그러나 이 금지는 사기극으로 비쳤다. 왜냐하면 금지되기 전에 탈레반 지도자들과 밀매상들은 많은 양의 아편을 구입해 놓은 상태였는데 그 이전의 풍작 때문에 4년간의 비축량이 있었다. 금지가 내려지자 아편 가격은 폭등했고 그 시점에서 탈레반 리더들은 사상 최고의 가격으로 이익을 보았다. 그것은 내부자 거래 행위의 극단을 보여준 것이었다.

2001년 9월 11일 아편 1킬로당 746달러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지만, 미국의 침공이 예견되자 몇 주 만에 95달러로 떨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가격 하락에도 불구하고 충분한 양귀비 비축량이 있었는데 이는 그들이 미국을 기다리며 상당한 무기를 구입할 수 있는 양이 되었다.

미국이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준비하면서 그들은 탈레반의 군사력에 피해를 줄 목표가 부족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공격 가능한 20개 이상의 주요 마약 제조소(drug labs)와 창고 건물을 포함한 많은 유사한 장소가 선정되었다. 그러나 일단 침략이 시작된 후 마약상들이 미국의 표적이 되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했다.

아마도 이는 미국이 아편 무역에 의존하는 지역 군벌들(warloads)의 협력을 필요로 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한 집단 중 하나가 북부동맹이었다. 양귀비 재배 금지 이전에 북부동맹은 아편 밀매의 5%만 관여했었던 반면 탈레반은 75-80%에 이르렀다. 그러나 2000년 북부동맹은 2,460 헥타르에서 6,300 헥타르로 재배량을 늘렸는데 이는 당시 아프간 생산량의 85%에 달했다.

미국의 침공이 시작되자 도널드 럼스펠드 당시 국방장관은 그들의 마약 제조소를 공격하는 것을 고려했었으나 그로 인한 “부수적 피해”가 예견되어 그렇게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영국으로 밀매되고 있는 헤로인의 원산지가 아프가니스탄이었기 때문에 영국인들을 좌절시키기도 했다.

2002년에 양귀비 농사가 재개되었고 74,000 헥타르의 땅에서 양귀비가 경작되었다. 2003년,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했을 때와 같이 물라 오마르 휘하의 탈레반은 재결집하여 미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파키스탄과 이란 국경에 있는 헤로인 제조소를 보호했을 뿐만 아니라 아편 생산에 따른 세금 징수를 통해 계속해서 자금을 모았다. 나아가 일부 탈레반 사령관들은 정제소를 직접 장악하여 운영하기도 했다.

그러나 2007년 12월 국제연합군이 무사 칼라를 장악했을 때 50개의 헤로인 제조소가 가동되고 있었다고 보고되었다. 2008년까지 아편을 순도 있는 헤로인으로 바꾸는 서구 인터넷 유저들이 호응하는 사이트 수가 30개에서 50개로 대폭 증가했다.

유엔 마약범죄사무국(UNODC)에 따르면, 2020년까지 양귀비 재배에 할당된 토지의 양이 37% 증가했다. 따라서, 확신하건대 마약에 대한 전쟁이 아니라 마약에 의해 자금이 지원되는 전쟁이었다. 러시아에 대항하는 경우와 마찬가지로, 탈레반을 패퇴시키는 것이 헤로인 거래를 패퇴시키는 것보다 더 큰 목표였다.

서구의 점령이 끝나면 아프간에서의 헤로인 거래는 더욱 증가할 것이다. 유럽연합과 영국 정부는 탈레반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미국인들이 어떻게 할지는 불분명하지만 현 미국 행정부는 한편으로 이란인들에 대한 동정심을 보여주며 전 트럼프 정부가 취했던 이란 제재를 철폐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미국인들이 아프간을 떠날 수 있도록 허가해 준 탈레반에 많은 신뢰를 보내고 있기도 하다.

탈레반이 새 정부를 구성하자, 4명의 탈레반 고위 관리들이 미국의 관타나모 베이 수용소에 수감되었던 인물이었음을 알게 된다. 그들 중 한 명은 천만 달러의 현상금과 함께 테러 혐의로 FBI에 의해 지명수배 중이었다. 탈레반 정권의 인선에 대한 미국 국무부의 반응은 정부 구성 인사 중에 여성이 없어서 실망한다는 내용뿐이었다.

90년대처럼 다시 내전에 빠질 가능성이 크겠지만, 누가 카불을 지배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누가 아편 무역을 통제하느냐가 관건이 될 것 같다. 그러나 설사 내전이 없더라도 탈레반이 외세의 점령 기간 동안 아프간에 강요되었던 자유주의 이념으로 통치할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리고 헤로인 무역은 이제 탈레반 생존의 핵심사항이라 자연적으로 확대될 수밖에 없다.

직시해야 할 현실은 서방 국가들이 마약의 수요(demand) 문제를 다루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마약과의 전쟁이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모든 비즈니스 모델의 핵심은 수요와 공급 요소이고 유럽과 미국의 당국이 보다 많은 정책을 내세워 마약 사범의 기소를 늘릴 경우 마약의 수요는 자연스럽게 증가하게 된다.

많은 신뢰를 배경으로 한국은 마약에 대해 매우 강경한 입장을 계속 취하고 있고 마약사범들이 감옥에 가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이것은 보다 진보적인 국가에 있으면서 마약에 대한 욕구를 경험해 보고 마약이 일종의 유행이라는 인식을 지닌 후 귀국한 한국인들에 의해 야기되는 수요의 증가를 막지는 못했다.

비록 헤로인이 한국에서 필로폰과 같은 다른 마약들만큼 인기가 있지는 않을지라도 펜타닐에 대한 수요는 증가하고 있고 아편계 중독은 흔하다. 정부가 처방전 남용을 계속 단속한다 해도 마약에 대한 새로운 창구는 계속 열릴 것이다.

한 가지 창구로는 400명에 가까운 아프간 난민들의 도착일 수 있다. 그들은 지금까지 많은 한국인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었고 우리는 이 사람들이 아프가니스탄에서 한국인들과 함께 일했다고 들었다. 하지만, 알려진 테러리스트들이 영국행 비행기에서 발견되었고, 미국 당국은 그들의 난민들 중 대부분이 영어를 할 줄 모르는 사람들의 세부 사항을 확인하려고 애쓰고 있다. 그래서 그들이 통역자로 일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9월 6일 독일 미 공군기지로 대피한 한 아프간 난민 남성이 미국행 비행기에 탑승하면서 폭발용 캡과 점화 스위치, 그리고 다른 폭발물 관련 물질을 소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한국 정부가 아프가니스탄 입국자들을 어떻게 지원할지는 아직 분명하지 않지만, 영국 정부는 아프간 난민들의 음식과 필수품 구입에 주당 5만 원 정도의 금액을 지원한다고 발표했다. 런던에서는 커피 한 잔 값이 15,000원으로 이 한 잔을 사기 위해 힘들게 노력해야 한다. 향후 이 난민들이 영국에서 잘 살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향후 한국 당국은 이 사람들이 한국에서 어떻게 생활할 것이며 또한 어떻게 생존해야 하는지를 고민해야 할 것이다.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은 매우 자랑스러운 민족이다. 그들은 외국 세력으로부터 패배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이 한국에서 극도의 빈곤으로 내몰린다면, 그들은 헤로인이라는 그들의 조국과의 무역 관계를 만들고 싶은 충동을 느낄지도 모른다. 이는 오래 걸리지 않는다. 돈은 은행을 통해 송금하지 않을 것이고, 대신 그들은 출국하지 않고 송금하는 하왈라(Hawala) 시스템에 의존하게 될 것이다. 즉, 중동에서의 돈세탁 운영에 활용되는 일반적인 시스템을 사용할 것이다.

향후 12개월은 모든 관련 당사자들에게 매우 중요한 시험 기간으로 확인될 것이다. 한국마약퇴치운동본부(KAADA)와 같은 조직은 그들의 사업 운영이나 처리 방식을 국제화해서 이와 같은 일의 뒤처리도 담당해야 한다. 한국마약퇴치운동본부는 세계적인 마약 밀매와 국제 밀매업자들-이들 중 다수는 인신매매와 연관됨- 이 사용하는 유통경로를 파악해야 한다. 나아가 이러한 급성장하는 위협으로부터 적절한 정책이 채택되어 국가가 보다 잘 보호될 수 있도록 정부 기관에 위험성 평가 보고서를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DSRM : 개인 및 기업 보안에 마약 테스트 개발, 아동·여성 성범죄 예방 관련 컨설팅 업체

『Anthony Hegarty씨는 각국의 정부를 비롯한 민간단체들에게 세계적인 마약 밀매와 그것이 어떻게 그 나라의 사회와 사회기반 구조에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자문하고 있다. 그는 마약과 관련된 성폭력 문제의 전문가이기도 하다. 연락처는 dsrm.kor@gmail.com / 010-8160-3563이며 한국마약퇴치운동본부(02-6929-3185)를 통해서도 연락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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