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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약류 예방•재활사업 제도가 없는 상태에서 제도화의 방향으로
이 한 덕
- 전 한국마약퇴치운동본부 사업부장

한국마약퇴치운동본부에서 31년 5개월 11일을 보낸 후, 떠나면서 기쁨이 먼저 왔다.
2024년도에 중독재활센터가 14개소 추가 설치 되고 24시간 마약류 콜센터가 가동되면서 전 국단위로 표준화된 프로그램을 실시할 기반을 마련한 것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남은 직원들이 더 좋은 대우를 받으면서 단순한 직장인이 아닌, 자신의 전문능력을 더 키우면서 사명감을 갖고 봉사하면서 헌신하는 전문가로 임해주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2024년 1월 8일 국회는 교육환경 보호에 관 한 법률 제9조*에 제30호(중독자재활시설)의 내용을 신설하는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즉 학교주변 직선거리 200m 이내에는 「정신 건강보호법」 제3조 제7호에 따른 중독자재활 시설에 해당하는 행위 및 시설을 금지하였다.
중독자재활시설이 학생의 보건ㆍ위생, 안전, 학습과 교육 환경을 위해하는 행위이고 시설 이라는 것이다. 이 규정의 적용을 반대하는 청 원 운동이 필요한 시점이고, 현재 확대 설치하 려는 마약류중독재활센터에 까지 확대 적용하 려는 시도에 대비하기 위해서도 정확하고 설 득력 있는 반대 논리를 정립해야 할 것이다.
마약류사범의 중심이 40대에서 20대로 이미 젊어졌고, 특히 10대의 마약류 사범이 폭발적 으로 증가하고 있는 상황에서 마약류 문제를 해결하는 한 축이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아직도 마약류 문제가 있는 사람을 도덕적으로 파탄된 사람, 공존할 수 없는 사람, 매우 공포 스러운 사람으로 인식하고 있고, 그런 사람들 을 모아놓는 시설이 얼마나 무섭고 얼마나 사회 에 해를 끼칠까 두렵기 때문에 사회에서는 추방 해야 한다는 그 무책임한 주장과 상황이 얼마나 개탄스러운가.
지난 1월 13일 경기도다르크 신년 축하모임에 서 한 입소자 어머니는 “잘 성장하여 좋은 직장 에 다니고 있던 아들이 마약을 했을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고 맨붕이 왔었다고 했다.” 결국 입소시설인 중독자재활시설에 와서 다시 바로 서는 모습을 보면서 감사함을 표시하 고 있었다.
지금의 마약류 상황은 자신에게도 가족에게도 예외없이 발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발생한 사회 내에서 함께 해결해나가야 한다는 인식의 확산이 필요한 시점이다.
* (교육환경보호구역에서의 금지행위 등) 누구든지 학생의 보건ㆍ위생, 안전, 학습과 교육 환경 보호를 위하여 교육환경 보호구역에서는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행위 및 시설을 하여서는 아니 된다.
한국마약퇴치운동본부 31년의 역사는 제도가 없는 상태에서 마약퇴치 활동을 하였고, 제도를 만들기 위해 무진 노력을 하였으며, 점점 제도 가 하나씩 만들어지는 상황으로의 마약류 퇴치 활동이라고 정의할 수 있겠다.
1998년경 마약류 수요감축 사업, 즉 예방 및 재활사업을 하기에 매우 어렵고 조직을 운영하 기에도 벅찬 상황에서 민관식 이사장님을 모시 고 미국 DEA 관계자들과 만남을 가지면서 다 양한 이야기를 하다가, 현재의 상황을 이야기하 니 해결책은 마약 문제가 급속도로 확산되면 단 방에 해결될 것이라고 우스갯소리를 들은 기억 이 난다. 당시에도 우리 조직은 노력하여 마약 문제가 해결되면 사라지게 되는 숙명을 안고 있 지만, 마약류 문제를 현상 상태로 유지해도 성 공이라는 이야기도 했었다.
1992년 7월 20일, 사무총장(당시 대한약사 회 정책실장을 겸직하여, 대한약사회로부터 월 급을 받음)을 중심으로 나를 포함한 직원 3명 이 대한약사회관 지하 1층의 한 작은 사무실에 서 컴퓨터도 복사기도 프린터도 없이 연필과 책 상과 전화기만 있는 상태에서 시작하였다. 비가 오면 바닥에 물이 흥건히 적셔져 청소하기 바빴 다. 마약류 관련 책자도 한 권 없었다. 우리도 마약류에 대한 지식도 정보도 없었고, 어떻게 무엇을 해야 할지 아무것도 준비되지 않았다. 재단법인으로 설립되었음에도 자금도 1천만 원 밖에 남지 않았다. 또한, 정부의 강력한 요청으 로 대한약사회가 5천만 원을 부담하여 만들었 음에도 마약법에 설립근거도 마련하지 못한 상 태였고 당시 민법 제38조에 근거할 뿐이었다.
이런 막막함 속에서 보건사회부 출신 사무총장 의 지도로 1993년도 국고 보조예산을 확보하 기 위해 예산서 및 사업계획서를 작성하고 정부 에 제출하여 확보에 노력하면서, 자체 운영 자 금을 마련하기 위해 약사회원들에게 호소하는 글을 작성하여 약사공론의 도움을 받아 모든 약 사회원에게 발송하는 작업 등 다양한 노력을 진 행하였다. 동시에 대한약사회 시도지부에 한국 마약퇴치운동본부 시도지부 역할을 수행하도록 하는 지부 설치 노력도 병행하였다. 중앙과 시 도지부를 통해 마약퇴치캠페인을 전국적으로 전개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1993년 하반기에 한약 분쟁이 발생하 고, 대한약사회가 그 중심에 서면서 한국마약퇴 치운동본부도 엄청난 영향을 받았다. 실제 마약 퇴치사업을 전개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당시 대한약사회장이 한국마약퇴치운동본부 이사장 을 겸직하고 있었고, 부이사장단이 대한약사회 임원과 서울시약사회장으로 구성되어 있었으 며, 대한약사회 건물 내에 자리 잡고 있었다. 외 부에서는 한국마약퇴치운동본부를 대한약사회 의 하나의 위원회쯤으로 폄하하기도 했었다.
* 여담이지만 당시 마약퇴치운동본부의 영문명칭은 “Korean Anti-Drug Campaign Center”로 사용하였고 2002년경에 현재의 명칭으로 개정하였다.

마약퇴치운동본부 홍보부스
1994년 국회의장직무대리를 역임하신 민관식 박사 가 이사장에 취임하여 2001년 명예총재로 물러나실 때까지 마약퇴치운동본부가 자생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였고, 대한약사회의 영향권에서 벗어날 수 있 게 되었다. 국고 보조예산은 1억 원에서 8억 원까지 증액되었고, 1994년부터 소득세법과 법인세법에 마 약퇴치운동본부에 후원하면 세금감면을 받게 되었으 나 마약법에 설립근거를 마련하는 노력은 계속 실패 하였다.
그러니 수십 개의 시민사회단체의 실무책임자들이 이 사회에 참여하고 단체장들은 자문위원회에 참여함으 로써 명실상부한 마약퇴치를 위한 범시민단체 협의체 로서의 위상을 갖게 되었다.
또한, 당시 김영삼 대통령께서 마약퇴치후원회원 1호 로 가입해주면서 후원금 및 기부금 확보를 위한 노력 에 큰 성과를 거두었다. 지금도 꿈과 같은 이야기지만 당시 사무총장과는 매일 아침 7시경에 미팅하면서 후 원금 확보 목표 150억 원을 달성하여 그 이자수익으 로 운영하면서 사업비는 국고 등 프로젝트 사업을 받 아 진행하는 명실상부한 재단법인체로 발전시키는 것 을 목표로 삼고 밤을 지새우면서 일했다.
1990년대에는 일반인들의 마약류 문제에 대한 인식 을 높이고 확산되는 유해 화학물질 남용 문제를 해결 하기 위한 노력에 집중하였다. 실제 이런 활동을 위한 제도적 뒷받침은 없었다. 아니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1997년 대한약사회 지부를 활용한 마약퇴치사업의 한계를 절감하고 부산, 광주, 인천에 지부를 설치하여 운영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전국적으로 마약퇴치사업 을 전개할 수 있는 망을 구축하게 되었다.
그러나 마약퇴치사업을 전개하는 현장의 상황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1995년경 당시 본드, 부탄가스 등 흡입 청소년 문제가 매우 심각하여* 서울시내 학 교에 마약류 및 약물남용 예방 교육을 해주겠다는 공 문을 보냈지만 수많은 학교에서 항의 전화를 받았다. 이에 굴하지 않고 서울 강남구약사회와 협력하여 점 차 예방 교육을 늘려나갔다.
1990년대에는 유해학물질의 남용 확산을 방지하기 위해 교육 영상, 책자, 만화책 등 수많은 자료들을 개 발하여 지속적으로 학교 등으로 보급하였고, 교육부 와 협의하여 양호교사(보건교사)를 대상으로 한 4일 프로그램 등 다양한 프로그램 제공, 지역사회의 다양 한 자원을 발굴하기 위한 72시간 전문과정프로그램 등 수많은 프로그램을 제공하였다. 1997년부터는 1 박 2일 일정으로 마약퇴치 심포지엄을 개최하여 마약 류 문제에 대한 인식을 사회의 다양한 분야로 확산시 키면서 병원에서 마약류 중독치료를 받고자 하는 사 람을 보건사회부에 보고하고 보건사회부는 경찰에 신 고해야 하는 제도를 없애는 여론을 만드는 데 큰 역할 을 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마약퇴치이동 홍보차량 설치 운영, ARS, 라 디오, TV, 지하철, 극장, 언론사의 대형전광판 등 다양 한 매체를 활용하여 마약퇴치 광고 활동 등을 전개하 였다. 또한, 서울소년원, 보호관찰소 등에 직접 찾아가 고 학교의 유해 화학물질 문제 청소년들에게도 회기를 갖는 집단교육프로그램을 제공하는 등 역량을 총동원 하여 노력하였다. 그런 결과 때문인지 2000년대들어 유해 화학물질 남용 문제가 급속히 사라지게 되었다.
이런 시점에서 국회 보건복지위원회를 중심으로 치료 보호제도를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지역사회 내에 24 시간 마약류 중독자를 케어하는 시설이 있어야 하고 이를 한국마약퇴치운동본부가 설치 운영해야 한다고 했다. 2021년 이사장에 취임한 김명섭 박사는 당시 국회 보건복지위원으로 중독자 재활 시설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지금 같으면 먼저 제도를 마련하고, 충분한 예산(인건 비 포함)을 지원해달라고 요청했겠지만, 필요성만을 생각하고 준비에 들어갔다. 단속기관에 종사하는 많 은 지인들이 “시설을 설치하여 운영하면 중독자 문제 로 ‘너는 쫓겨날 것이니, 하지 말라’고 많이 말렸다.” 그러나 조직 내부 구성원들을 설득하고 외부 전문가 및 많은 기관들의 도움을 받고, 식약처 마약관리과의 적극적인 협조를 얻어 2002년 송천쉼터(이후 송천 재활 센터, 중독재활센터로 이름이 바뀜)를 개소하여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마약류 중독자를 사회 내에서 케어하는 시설을 운영하게 되었다. 많은 직원들의 노 고가 있었고, 결국 지금은 더 이상 운영되지 않지만 다양한 재활사업을 추진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2002년 어느 날, 김명섭 이사장께서 가장 필요한 한 가지를 말하라고 했다. 바로 한국마약퇴치운동본부의 설립근거를 마련해 달라고 했다. 2002년 12월 마약 류관리에 관한 법률에 근거 규정을 갖게 되었고, 지난 10년 동안 설치 근거가 없어 경제기획원 등에서 국고 보조예산을 확보할 때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그 수많은 수모를 겪었던 기억이 사라져감을 느꼈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 후원금 및 기부금 확보가 어 렵게 되자 마약퇴치운동본부 운영 자체가 어렵게 되 었다. 2002년부터 거의 3년간 국고 보조예산에 인건 비 항목을 넣는 노력과 관련해서 많은 시련을 겪었고, 불충분하게나마 포함시켰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왜 그렇게 미련하게 했는가 하는 아쉬움이 있다. 당시 여당 사무총장이었고 국회 정보위원장도 역임하였던 김명섭 이사장님의 도움을 받았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있지만, 당시에는 사무총장도 더 이상 이사장 에게 부담을 주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었다.
송천 재활 센터의 프로그램을 바탕으로 교육 조건부 기소유예 제도, 수강명령제도가 활성화되었고, 2011 년부터는 8개 교정시설의 마약류 사범 재활교육을 제 도화하여 실시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또한, NA자 조모임도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2018년부터는 입소 시설에서 이용자 중심으로 운영 하는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바뀌어 마약류 중독자에 게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고, 2020년 부산, 23년 대 전에 설치되었고, 24년에는 전국으로 확대 설치될 예 정이다.
이런 활동들을 뒷받침할 근거는 한국마약퇴치운동본 부가 활동하고 그 결과가 쌓여 후에 만들어지는 경향 이 강했다. 이제는 먼저 제도가 만들어지고 충분한 예 산이 확보되어 보다 효과적이고 효율적으로 사업을 운영하는 데 초점을 맞추어 주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 당시 학교청소년을 대상으로 실태조사를 해보면 2-4%가 흡입한 경험이 있다고 응답하였다. 또한 소년원은 거의 대부분이 유해화학물질 흡입 청소년으로 채워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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