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꽃들이 모여 아름다운 화단을 이루듯 우리 아름다운 가정을 만들어요.” 1982년 4월 15일 아내가 나에게 한 말이었다. 그로부터 20년 후. 2005년 4월 15일 새벽의 안개를 뚫고 인천공항으로 달리는 차 속에서 군에 가있는 아들에게 전화를 받는다. “아버지, 어머니 결혼기념을 축하해요. 즐거운 여행 되세요.” 명문대학 기계공학과 2학년을 휴학하고 현재 군 복무중인 아들은 자기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는데 참 뜻밖의 인사에 눈물이 핑 돌았다. 인천국제공항 미팅 포인트! 여행회사에서 여행일정표, 비행기티켓, 보딩패스 그리고 조그마한 선물 포장된 박스를 선물 받고 우리 부부는 8박 9일의 동남아여행, 결혼24주년 기념여행을 떠났다. 같이 잠을 잔 날을 기억할 정도로 떨어져 있었던 시간이 많았던 지난 세월, 나쁜 기억 모두 버리고 신혼여행 같은 기분으로 두 손을 꼬옥 잡고 홍콩의 관광지, 야경, 점보식당, 요트도 타고 싱가포르의 새들의 공원, 분수 쇼 등 깨끗한 거리를 활보했다. 말레이시아의 고무나무 농장과 민속촌, 회교사원 등 이국적 분위기에 심취되어 사진 찍었고 기념품을 사며 일생에 남을 많은 추억을 쌓았다. 마지막 여행지 태국에 도착하여 방콕의 왕실, 에메랄드 사원, 알카자 쇼, 코끼리투어, 송바이 축제를 모두 보고 3시간의 버스를 타고 파타야로 옮겼다. 해안휴양도시 파타야는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여행의 하이라이트로 모터보트를 타고 바다로 나가 페러그라이딩을 하는시간. 우리부부는 온몸에 안전벨트를 하고 안내요원의 지시에 따라 보터보트가 끌고 가는 힘에 의해 하늘로 치솟았다. 구름 한 점 없는 파란하늘. 바다 속까지 들여다보이는 에메랄드빛의 투명한 바다. 창공에 떠있는 황홀함에 탄성이 저절로 나온다. 이때 아내가 하늘의 허공에다 큰 함성으로“목인아! 이젠 두번 다시 마약 하지 마라.”하고 팔을 벌린 채 눈물을 흘리며 절규하듯 기도하듯 소리를 질렀다. 갑작스런 아내의 행동에 놀란 나는 나도 모르게“희야! 알았어. 이젠 절대 안한다.”이렇게 화답하고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억지로 참고 착륙했다. 그날 밤 호텔에서 태평양의 밤바다를 내다보며 페러그라이딩에서의 아내의 절규를 생각하고 난생처음 축복받은 참회를 하게 된다. 이국 멀리 결혼기념여행까지 와서 하늘에 기도하듯 절 규하는 아내의 마약하지 말라는 절규에는 이러한 지난 사연들이 있었다. - 악마와의 만남 -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 다녀온 후 79년도에 한국굴지의 유명브랜드 패션회사 디자인 상품기획실에 입사하여 기획 상품 인지조사 및 패션쇼 주관 업무를 하게 됐다. 이때 각 방송국, 연 예오락 PD, 연예인, 음악뮤지션, 모델, 공연기획자들과 유대관계가 자연스럽게 이뤄졌다. 1982년 4월 15일 국가공무원인 아내와 결혼을 했고 1983년에 큰아들을 낳고 1985년에는 둘째아들을 얻었다. 동부이촌동의 상류사회집단속에서 많은 인간관계를 갖고 성실하게 살아오던 중 1985년 12월 서울 한남동 하이야트 호텔 리젠시 볼룸에서 패션쇼 기획을 맡아 가설무대장치를 밤새 작업 하던 중 음악을 담당한 선배로부터 피곤하지 않고 기분이 좋아진다는 권고에 따라 호텔 화장실에서 마약주사를 맞았다. 한국음악계의 인지도가 높은 존경하는 선배의 선물이라 생각하며 나를 허락한 것이 악마와의 첫 대면이다. 뒷머리가 하늘을 치솟는 듯한 느낌과 정신이 맑아지는 듯하여 마약이라는 경계 의식이 없어 소개해준 그 선배를 고맙게 생각했다. 마약은 구할 때도 없었지만 그 선배님이 몇 달에 한번씩 주어 그리 집착하지않았다. 1986년 아시아게임이 우리나라에서 열리던 해 선배를 비롯한 유명연예인과 함께 투약혐의로 수원지검에 구속되었다. 난생처음 법적 처벌을 마약으로 받았고 40여일 만에 집행유예로 풀려나서 구치소에서 사귄 사람들을 통해 마약을 구하고 불과 3개월도 안되어서 동대구 관광호텔에서 마약을 구하려다 체포되어 20개월을 집행유예까지 복역했다. 이로 인해 모든 명예는 다 사라지고 아내는 두 아이를 데리고 친정으로 내려가 별정직 공무원으로 일하게 된다. 아내는 명문여고 출신의 수재이고 일찍이 공무원 임용시험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한 재원이다. 나를 사랑하고 말 한마디 없이 모든 잘못을 용서해주었다. 장손의 며느리고 집안의 대소사를 다 이끌어온 정직한 사람이다. 이에 반해 나는 폭군처럼 행사했다. 어떠한 충고도 의식하지 않고 오만불손했다. 사람이 무너지는 것은 한 순간이었다. 이때는 될 대로 되라는 식의 막무가내로 마약을 찾게 되었고 교도소 에서 사귄 사람들과 어울리다 전주에서 또 구속되게 된다. 이때도 아내는 용서했다. 1년의 형을 복역하는 사이 막내아들 영규가 후천성 심장병으로 서울대병원에 입원한지 6개월 만에 이 세상을 떠났다. 나를 꼭 빼닮은 아이, 통증이 올 때면 아빠 찾아오라고 떼를 쓰며 울었고 엄마보고‘아빠하고 싸우지 말고 행복하게 살라’는 말로 이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아내는 이 아이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이혼은 생각해보지도 않았다고 한다. 출소 후 아내의 건강악화 그리고 침체된 가정을 재건하기위해 나는 10년 동안 마약을 하지 않고 열심히 살았다. 부동산 회사도 갖고 아파트 건설시행회사도 하게 됐다. 어쩌다 TV에서 마약에 대한 것이 나오면 채널을 돌려버리고 우리가정에서는 마약은 말도 꺼내지 않았다. 영규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나는 돈 버는 취미로 살았다. 그러나 2000년 추석 때부터 내 속에 숨어있던 마약의 용수철이 뛰어나온다. 방심한 결과였다. 그동안은 죽은 자식과 아들의 장래, 아내의 고생이 내 마음속의 마약의 용수철을 누르고 있었 는데 10년이란 세월에 그만 방심한 결과이다. 많은 마약을 투약하고 다른 범죄까지 저질러 2년의 형을 언도 받고 2003년 1월 1일 부산교도소에서 출소 할 때까지 아내는 한번도 면회나 편지도 없었다. 큰아이는 어느 대학을 지원했는지? 어떻게 사는지도 모른 채 마음고생을 많이 했다. - 잡채와 눈물 - 2003년 1월 1일 부산교도소를 출소할 때 굳게 다짐을 하고 막내 동생이 마중을 나와서야 아내는 순대국 장사를 하고 우리아들은 서울대 공과대학에 입시원서를 내고 합격을 기다린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내가 없어도 각자 자기역할을 다해준 가족이었다. 새벽에 도착한 나는 집에 들어서는 순간 아내가 차려 놓은 식탁에서 잡채를 발견하곤 끝내 참았던 눈물을 쏟고 말았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잡채이다. 아내의 젖은 눈에서‘정말 이번엔 정신을 차렸나?’하는 기대를 볼 수 있었고 자식은 기대 반 의구심 반으로 나를 대했다. 아내와의 약속은 이젠 순대국 장사를 같이 하면서 자식 뒷바라지나 하자는 약속이었다. 드디어 아들은 서울대학에 입학하였고 동네에는 플래카드가 걸리고 그 소문으로 순대국 장사도 더욱더 잘되었다. 아들 입학식 날! 온 천하를 얻은 느낌으로 아내와 아들에게 감사의 편지를 보냈고 우리가족은 울고 웃으며 파이팅을 외쳤고 2004년 새해맞이를 낙산사로 아내와 함께 갔을 때 아내와 기도한 제목은 아들의 성공을 기원했다. 그때도 나에게 마약에 대한 불안은 하나도 없었다. 순대국 장사는 문전성시를 이루며 장사는 불황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잘 되었고 아들은 명문대학에서 동아리회장 그리고 벤처기업모의창단대회에서 최고의 CEO상까지 받는 영광도 누렸다. 아침새벽장사는 내가, 저녁마감도 내가 하며 24시간을 아내와 함께 보내며 사람 사는 재미를 찜질방에서 노래방 그리고 외식 등으로 느꼈다. 아내는 승용차도 새로 바꾸어 주고 노는 날이면 이곳저곳 많은 여행도 함께 했다. 행복이 이런 거구나 하면서 수시로 아내는 잡채를 맛있게 많이 해주었다. - 아악 비명소리 - 2005년도에는 아들이 군대에 갔다. 우리 부부의 계획은 아들이 군에 간 동안 열심히 벌어서 아이 유학비를 저축하는 것이다. 아들의 군 입대 영장은 2월 1일 춘천 제OOO보충대로 입대하라고 날라 왔다. 1월 중순! 나 모르는 전화번호가 새벽에 부재중으로 찍혀있다. 가게에 출근해서 전화를 해보니 이천의 모 공중전화이다. 이어 아침 8시경 전화가 왔다. 참 반가운 목소리다. 성동구치소 같은 방에서 있던 김 모씨였다. 3개월을 한 방에서 지냈다. 육체미 보디빌더였고 친구의 꾐에 빠져 마약을 하게 되었다고 많은 반성을 하는 인상 좋은 사람이다. 매너가 좋고 가정도 의사, 박사의 형제들로 아주 가깝게 지낸 사이다. 아내와 아침교대를 하고 약속장소로 나갔다. 얼굴을 보자마자 차 속에서 마약을 꺼낸다. 마약을 보자마자 가슴이 뛴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나는 5년 만에 또 주사를 맞았다. 맨 처음 아무런 조건 없이 준 줄 알았지만 내가 덫에 걸렸구나 하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돈을 요구한다. 밤11시에 일백오십만 원을 빌려달라고 한다. 불과 5분 사이에 그동안 어렵게 쌓아온 모든 행복이 깨지는 비명소리가 내 속에서 흘러나온다. 약 기운에 휩쓸려 1달 동안이 친구들과 지내면서 많은 돈을 썼다. 마약을 하면 잠을 못 잔다. 감정이 들쑥날쑥하여 한곳에 오래 머무르지 못하고, 성적인 상상이나 윤리적으로 생각하기 힘든 변태적인 생각과, 방황을 많이 하게 된다. 처벌과 아는 사람들과의 접촉이 두려워 호텔에서 두문불출 하고 일가친척과 아는 지인들에게 전화를 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금을 조달하여 명품쇼핑중독자처럼 마구 물품을 구입하게 된다. 약 기운이 떨어지면 공포와 두려움을 잊기 위해 또다시 투약하는 악순환을 거듭한다. 약을 구하기 힘든 관계로 약을 파는 사람에게 최상의 예우를 해주고 늘 가까이 있게 하여 구입을 자유롭게 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집과의 연락을 두절하고 이에 대한 괴로움이 우울증으로 변하여 자살을 결심하게 했다. 이러한 증상으로 이번에 아내 모르게 집에 거짓말을 하면서 속였다. 밤낮 가리지 않고 걸려오는 전화! 돈을 요구하거나, 마약을 팔아달라고, 소개나 알선을 해달라는 공포분위기 조성에도 나는 다시한번 단절을 계획하고 마음을 다잡았다. 그런데 3월 14일 구의동에서 교통사고를 일으켰다. 나의 졸음운전으로 중앙선을 침범하여 사망사고를 내게 되었다. 아내가 순대국 장사를하면서 한푼 두푼 모은 돈으로 민형사 합의금과 변호사 비용으로 몇 천만 원이 날아갔다. 정말 양심상 견딜 수 없어 나는 난생 처음 아내에게 처음으로 마약투약사실을 고백했다. - 고 백 - 지금까지 아내는 내가 검거가 된 후에야 마약투약사실을 알았다. 더 이상 아내를 속일 수 없었다. 차라리 아내의 심판을 받고 싶었고 힘들게 쌓아온 행복이 깨어지는 아픔을 이겨낼 자신이 없었다. 집에서 아내에게 1달 전의 나의 행동을 상세하게 고백했다. 아내는 두려움에 질린 공포의 얼굴, 창백한 얼굴. 아무런 질책도 하지 않고 나를 쳐다보며 그렇게 못 끊겠냐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묻는다. 나는 쓰러지는 고목처럼 아내의 작은 가슴에 기대어 엉엉 울었다. 나이가 50이 넘은 우리부부는 어린애처럼 마냥 울었다. 아내가 나의 등을 두드려 주며, 여보! 당신이 이렇게 나에게 고백을 하는걸 보면 당신의 의지를 확인할 수 있다면서 나를 위로한다. 자연암 주지스님으로부터 부적과 처방에 덧붙여 더 이상 관제수가 없다고 하며“당신은 정말로 더 이상 마약은 하지 않을거라”는 스님의 예언까지 들려준다. 약물해독작용에 좋다는 목초액과 보약 그리고 보이차 등으로 나의 건강관리를 해주었고 마약을 전해준 사람과의 연락을 두절시키기 위해 전화번호도 바꿨다. 그리고 자수기간에 자수를 할까? 아니면 밀고를 할까? 하는 불안한 마음을 갖고서 평상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아내가 이 사건으로 인해 동남아여행을 예약하고 우리는 모든걸 용서하며 잘 다녀왔다. 5월 22일 아버님 제삿날! 나와 아내가 아침을 먹고 배추를 다듬고 있을 때 건장한 남자 2명이 김아무 개씨 아시죠? 순간 온몸에 힘이 빠지고 정신이 혼미해 진다. ‘아들이 내일이면 첫 100일 휴가를 나오는데. 순대국집 장사는 어떻게 해. 차라리 투약을 한 적이 오래되었는데 부인을 할까?’ 순간적으로 아내를 쳐다보니“어떻게 해. 어머, 어떻게 해.” 하면서 발을 구른다. 수사관과 빨리 집을 떠나는 것이 현명하다고 판단되어 검찰로 향했고 나는 석달 전 사실 모두를 인정했다. - 페러그라이딩 약속 - 이 수기를 쓰면서 장난 같은 기분으로 마약을 시작한지 20년이 넘었지만 이렇게 후회를 한 적은 없었다. 마약은 절대로 용서가 없고, 기쁨과 고통 모두를 뒤범벅 시켜 주변에 사람을 머물게 하지 않는다. 마약은 거래하는 자체가 믿음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거래를 하는 순간의 지각을 멈추게 하는 무서운 약이다. 20년 동안 간헐적으로 폭발하는 화산처럼 나는 마약으로 인해 4차례의 처벌과 자식의 죽음, 장인의 별세, 엄청난 재산의 탕진을 겪으면서도 못 느꼈던 것을 20년이 되어서야 아내의 용서로 인해 비로소 내 몸속 깊이 박혀있던 마약의 뿌리를 캐낼 수 있었다. 이번 어떠한 처벌도 감수 할 것이고 이국 멀리 태국의 파타야 산호섬 앞바다 상공의 페러그라이딩에서의 약속으로 나는 아름다운 꽃으로 다시 태어났다. 아내와 내가 꾸민 화단에는 아름다운 꽃들로 가득 찰 것이며 아내와의 약속은 영원할 것이다. 사랑하는 아내에게 이런 말을 끝으로 수기를 마친다. “사랑한다. 너의 뼈 속까지….” <2006 한국마약퇴치운동본부 발간 수기집 '후회와 눈물 그래도 희망이' 에서 발췌>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