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계절 - 양근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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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2002년 10월, 히로뽕 투약∙알선∙소지∙판매, 대마초 흡연∙소지 등으로 징역 3년의 형을 받고 현재 OO교도소에서 재활교육을 통해 사회복귀를 준비하고 있다. 지금 이 시간 내 지난 과거를 돌아보고 잃어버린 내 자신을 찾고자 한다. 16살 어린나이에 가출을 해서 여자를 알고 마약도 배웠다. 35년을 살면서 정상적인 직장생활이나 학교 교육은 받아보질 못했고 마약에 빠져 쓰레기 같은 인생을 살았다. 나로 인해 사랑하는 가족들은 물론이고, 가까운 사람들에게까지 깊은 상처를 주었고 아직도 나 때문에 괴로운 상처를 안고 살아가고 있다. 나에게는 연로하신 부모님과 초등학교 6학년, 1학년인 두 아들이 있다. 5년 전에 내가 구속되어있던 상황에서 아이들 엄마와 이혼을 하고, 그때부터 두 아들은 부모님께서 돌보시고 계신다. 초등학교 때까지는 우리 집도 동네에서 손꼽히는 부자였다. 아버지께서 정치에 관심을 가져 국회의원에 출마를 하고 낙선을 하면서 가세는 기울었고, 어머니께서 생계를 꾸려 나가셨다. 아버지께서는 술을 가까이 하셨고 우리 형제들과는 대화도 없이 엄격하시기만 했다. 커가면서 나는 아버지와 자주 부딪쳤고 결국은 집을 나왔다. 집을 나와 학교를 다니지 않는 친구들과 함께 생활을 했다. 내가 자란 곳은 바닷가이고 관광지여서 새벽까지 영업을 하는 곳이 많았다. 어린 나에게 그곳은 호기심의 천국이었다. 화려한 네온사인으로 우리를 유혹하는 그 도시는 매일 밤 나를 그 곳으로 불러 음악을 듣고 춤을 추게 하였다. 그곳에서 나와 비슷한 친구들을 사귀면서 술, 담배, 대마초 그리고 필로폰까지하게 되었다. 돈이 필요하면 모르는 상대에게서 돈을 빼앗고 남의 물건에도 손을 대기 시작했다. 점점 방탕의 늪으로 깊숙이 빠져들어갔다. 자주 다니던 유흥업소에서 일을 하는 형을 알게 되었고 친하게 지냈다. 나이차이가 많았으나 외로운 나에게 친형처럼 잘 대해주는 그를 따랐고 많이 의지하게 되면서 함께 살게 되었다. 처음에는 몰랐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형의 이상한 행동과 집안 구석구석에서 피 묻은 주사기를 발견할 수 있었다. 나중에야 형이 필로폰을 한다는 것을 알았다. 형에게는 가끔 찾아오는 여자친구가 있었다. 며칠씩 잠을 자지도 않고 음식도 먹지 않는 형은 매우 예민했고 성격도 난폭해 져서 다른 사람처럼 변해갔다. 내가 처음 히로뽕을 배운 것도 그 형에게서였다. 처음에는 너무 좋았다. 모든 일에 자신감이 생겼고 몸은 새털처럼 가벼웠다. 가까운 친구들에게도 나누어 주었고 서로의 팔뚝에 주사를 놓아주었다. 너무나 좋은 경험이기에 좋아하는 친구들과 나누고 싶었다. 이 얼마나 슬프고 가슴 아픈 일인가? 지금 내 주변의 모든 친구들이 필로폰 의존자이다. 결국 형은 마약법위반으로 구속 되었고 필로폰을 구할 수 없게 된 나는 아는 루트를 통해 돈을 지불하고 투약하게 되었는데 효과는 처음과는 달랐다. 약 기운이 떨어지는 시간도 짧아졌고 그럴 때마다 몸도 많이 아파왔다. 감기몸살을 심하게 앓는 사람처럼 고열로 정신을 잃는 등 도무지 종잡을 수 없었다. 투약하는 횟수와 양도 늘어났다. 필로폰을 구하기 위해 돈이 필요했고 돈을 구하기 위해 남에게 돈을 뺏고, 도둑질도 하며 부모님이 안 계시는 틈을 이용해 어머니의 패물도 들고 나오기 도 했다. 그러는 동안 친구와 함께 대마초 흡연으로 경찰에 잡혀갔었고 구치소까지 넘어갔지만 초범이고 나이가 어려서 기소유예로 풀려날 수 있었다. 부모님께서 많이 놀라하셨고, 특히 아버지께서는 내가 한 행동들에 대해 몹시 수치스러워 하셨다. 그 일이 있은 후에 나는 잠시 집에 있었지만 학교는 퇴학을 당해 갈 수가 없었다. 집에서 놀면서 친구들과 다시 어울렸고 그때 아이들 엄마인 아내를 만나게 되었다. 그때 우리는 17살 동갑이었다. 나는 다시 집을 나왔고 그녀와 동거를 시작했다. 매일 집에서 친구들과 약을 먹고 대마초를 피우며 시간을 보냈다. 새벽에는 아는 선배가 장사하는 바닷가에 서 일을 도와주며 용돈을 받았고, 그녀는 맥주를 파는 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었다. 그렇게 모은 돈은 약과 대마초, 필로폰을 구하는데 썼다. 친구들과 나는 점점 필로폰에 깊게 빠져들었다. 필로폰을 구하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할 수가 있었다. 거짓말도 하고, 돈을 뺏고, 훔치고, 바닷가 노점상들 상대로 갈취도 하고…. 그때 나는 필로폰을 계속해야만 했다. 필로폰이 없이는 아무런 의미를 찾을 수가 없었다. 이런 생활이 계속되다가 결국 나는 다시 18살 때 친구들과 함께 구속이 되었다. 구치소에서 반성보다는 더 많은 사람들을 알게 되었고, 벌금형으로 풀려 나왔다. 주위에는 정상적인 생활을 하는 사람보다 는 마약전과자들이 하나 둘씩 많아져 갔다. 그 중 구치소에서 알게 된 선배와 다시 만나게 되었다. 그 선배는 필로폰을 전문적으로 판매하는 사람이었다. 그 선배를 알고부터 더욱 필로폰 중독에 빠졌다. 하루라도 필로폰이 없이는 살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나는 그 선배가 시키면 시키는 대로 했다. 그래야만 필로폰을 맞을 수가 있었다. 필로폰만 가지고 있으면 모든 사람들이 나를 잘 따랐고 돈도 쉽게 만들 수가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변해갔다. 3~4일씩 잠을 자지 않았다가 잠에 빠질 때는 2~3일씩 잠들기도 했다. 음식도 먹지 못했고 밝은 태양은 눈이 부셔 낮에는 밖으로 나갈 수도 없었다. 팔에는 주사바늘자국 때문에 항상 멍이 들어 있었다. 밤만 되면 앙상하게 뼈만 남은 도저히 사람의 모습으로 볼 수 없는 상태로 거리를 헤매고 다니곤 했다. 아이들 엄마는 그런 나를 보고 울기도 많이 했고 가슴 아파했지만 나는 더욱 깊게 약물에 빠져들었다. 나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약, 대마초, 필로폰뿐이었다. 어떤 때는 환청이 들렸고, 환시 까지도 보였다. 상태는 점점 심해졌다. 집사람은 이런 나를 도저히 그냥 둘 수가 없어 아버지에게 연락을 했고, 아버지께서는 나를 정신병원에 가두었다. 약 기운이 떨어지면서 나는 난동을 부렸고 독방에 감금되었다. 머리가 터질 듯이 아팠고, ‘더웠다 추웠다’를 반복했고, 입안 은 바짝바짝 타들어가 입술은 찢어지고, 몸에는 벌레들이 기어다니는 것 같은 느낌에 참을 수 없어 긁다보니 온몸은 피투성이가 되었다. 벽에다 머리를 박고 몸이 너무 아파 혼자서 울기도 많이 울었다. 결국 나는 침대에 묶여 주사를 맞아야만 진정이 되고 잠을 잘 수가 있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퇴원을 했지만, 곧 친구들을 만났고 마약을 조금씩 하다가 다시 구속되어 이번에는 집행유예를 받고 출소하였다. 그날 아버지는 나를 심하게 야단을 치셨고 나는 반항을 하며 집을 다시 뛰쳐나와 버렸다. 어머니께서는 나를 찾겠다고 다니시다 교통사고를 크게 당하셨다. 뇌수술까지 받아야했고 수술을 받고도 사람을 알아보질 못했다. 내 나이 20살 너무도 큰 충격이었다. 2차, 3차 수술이 거듭됐다. 다행히 의사선생님이 기적이라고 할 정도로 건강이 좋아져 2년 만에 병원에서 퇴원을 하시게 되었다. 나는 다시는 마약을 하지 않겠노라 다짐을 하였다. 한동안은 삼촌이 계시는 페인트공장에서 일도 했지만 이상하게도 그곳 사람들과 잘 지내지를 못했다. 조그만 일에도 화를냈고,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과도 싸움을 자주했고 한 가지 일을 오래 하지 못했다. 다시 옛 친구들을 찾게되었고 마약에 빠져 버렸다. 22살에 처가 큰아들을 임신하였지만 나의 생활은 변화가 없었다. 매일 마약에 빠져 가족은 돌보지도 않은 채 약에 미쳐만가고 있었다. 또 다시 구속이 되고 이제는 실형을 받았다. 그때 처음으로 크게 후회를 했고 아이엄마와 아들에게 너무도 죄스럽고 미안했다. 수감기간동안 다시는 마약을 하지 않으리라 다짐 또 다짐했다. 출소하고 일자리를 알아보았지만 쉽지 않았다. 생활비도 필요했다. 더이상 마약을 하지 않으리라는 다짐은 얼마가지 못해 허무하게 무너졌다. 교도소에서 알게 된 동료에게서 연락이 왔고 서로 만나면서 자연스럽게 필로폰을 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필로폰을 구해주면 돈도 만들 수가 있었다. 생활비도 이런 식으로 만들어 가며 지내다 두 번째 아이를 가지게 되었다. 아무 책임감이나 대책 없이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된 나는 필로폰 알선으로 기소중지 되어 가정도 돌보지 못하고 쫓기는 신세로 필로폰을 하며 여관을 전전했다. 내 자신이 너무 밉고 한심하여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때 나와 아주 친하게 지내던 친구가 갑자기 자살했다는 소식까지 들었다. 필로폰을 하고 집에서 목을 매달았다는 것이다. 나 또한 한동안 우울증에 빠져 괴로워하고 있다가 내 자신을 바꾸어보기 위해 배를 타보자는 결심을 했다. 150톤 정도의 고기잡이배를 탔다. 3개월 정도 많은 고생도 하고 이제 잘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도 가질 수가 있어 다시 돌아왔지만 생각과 현실은 많이 달랐다. 예전의 기소 중지 건으로 곧 구속이 되었고 실형을 살고 나왔다. 출소를 해도 도움을 받을 데도 없었다. 당장 생활비는 필요했지만 직장을 알아볼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나는, 결국 마약을 다시 찾게 되었고 결과는 너무도 뻔했다. 이번에는 마약판매로 구속이 되었고 아이들 엄마는 이런 나에게 지쳐 애들만 남겨둔채 떠났다. 10대 때부터 10년을 넘게 나를 지켜주었던 아이들 엄마가 떠나버린 것이다. 나는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내 자신을 돌볼 수가 없을 정도였다. 교도소 안에서 소란을 피우며 괴성을 지르고 동료들과 싸움도 자주하고 직원들과도 마찰이 많았다. 징벌에 또 징벌……. 내 안에 내가 아닌 또 다른 내가 하나 더 있는 것 같았다. 자주 흥분하고, 흥분하면 이성을 잃었다. 더 이상 여러 동료들과 생활이 되질 않아 독방에 수용되었고 청송2교도소에까지 가게 되어 순화교육도 받았다. 수년간 독방에서 지냈고 혼자서 가족들을 생각하며 피눈물을 흘렸다. 나도 TV에 나오는 평범한 사람처럼 행복하게 살고 싶다. 큰애는 부모님이 잘 돌보아 주셨는지 공부를 썩 잘하고 생각도 어른스럽다고 한다. 그 아들이 아빠와 함께 목욕탕에 다니는 친구들이 최고 부럽다고 한다. 부모님은 이제 칠순을 바라보고 계신다. 애들 엄마도 이혼은 했지만 가끔 애들을 돌보고 있다. 나에게 면회도 오곤 한다. 나의 인생 중에 너무 많은 시간이 마약으로 인해 망가져 버렸다. 두렵고 겁이 난다. 매번 반복되는 나의 모습, 마약은 정말 무서운 것이다. 부모님과 어린 두 아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찢어진다. 3년이란 시간 속에 2년 8개월을 살고 곧 사회복귀를 해야 하는데…….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아니 자신이 없다. 기술도 없고 가진 재산도 없고 당장 나가면 부모님도 모셔야하고 생활비에 애들 교육비까지……. ‘그냥 마약을 안해야지 열심히 살아야지’하는 수없는 다짐과 각오 밖에는……. 출소 이후 연고지에 있는 동안 주위에 마약하는 사람들도 많이 볼 것이다. 그 유혹을 이겨야하며 당장 마약으로 돈을 만들 수 있다는 생각도 버려야 할 것이다. 가족들의 시선도 두렵다. 분명한 것은‘마약은 절대, 절대로 안한다’는 것이다. 남은 수용기간 이곳 OO교도소에서 재활교육을 열심히 받으며 여러 직원 분들과 강사님들의 도움을 빌어 나 자신을 찾고 내 가족을 위해 다시 새로운 인생의 시작을 자신있게 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이다. 분명 쉽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나는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할 수 있고 앞으로 내 두 아들과 부모님과 함께 내가 진정으로 바라는 삶을 살아 갈 것이다. 아마도 난 내가 진정으로 바라는 삶을 지금까지 미루어 왔을 것이다. 내 나이 서른다섯 아직 늦지 않았다. 겸손하고 꾸준하게 나의 진정한 삶을 찾고 가꾸리라. 사랑하는 아들들에게 큰 울타리가 되리라. <2006 한국마약퇴치운동본부 발간 수기집 '후회와 눈물 그래도 희망이' 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