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86. Autumn, 2017

 

  마약약물 정보 _ Drug story

토마스 드 퀸시 ‘어느 영국인 아편중독자의 고백’

김애양
수필가ᆞ서울 은혜산부인과 원장
 

한번은 경찰관이 우리 병원을 찾아왔다. 젊고 호리호리한 아가씨와 동행이었다. 경찰관은 마약 용의자인 그 아가씨의 소변 검사를 위해 병원으로 데려왔다고 말했다. 마약 복용의 혐의가 있어 소변검사를 해야 하는데 용의자가 젊은 여성이다 보니 인권보호 차원에서 산부인과에 의뢰를 한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우리 간호사의 입회하에 소변을 보았고 그렇게 채취한 소변을 경찰에 넘겨주었다. 사실 경찰 뿐 아니라 간혹 검찰이나 군대에서 요청하는 이런 종류의 협조가 썩 기꺼운 건 아니었지만 이번 일을 보고 우리나라에선 마약관리가 철저히 이뤄지고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속담처럼 상대방을 간파하기란 쉽지가 않다. 제 아무리 용한 의사라 해도 진찰실에 마주앉은 아리따운 아가씨가 마약 중독자인지 아닌지 어찌 알 수 있겠는가?

심연에 자리 잡은 신성하고 무한한 기쁨의 세계가 갑자기 드러났다.

아편은 모든 고통을 사라지게 만드는 만병통치약이었다. 철학자가 수 세기동안 토론을 벌여왔던 행복의 비밀이 아편에 있었다. 이제 그 행복을 1페니로 사서 호주머니 안에 넣어 다닐 수 있게 됐다.

퀸시의 고백이 의미 있는 이유

마약중독자라고 하면 영국과 청나라가 벌인 아편전쟁 시절의 영화에 나오는 인물처럼 완전 폐인이 돼 몸을 벌벌 떨면서 구걸하는 모습을 상상하기 마련이다. 실제로 중독자 가운데는 일반인과 전혀 다를 바 없이 거리를 활보하기도 하므로 쉽게 감별할 수 없는 게 사실이다. 비단 마약뿐이랴? 알코올 중독자도 카페인 중독자도 수면제나 판피린 중독자도 평상시엔 타인과 구별할 수 없을 만큼 감쪽같이 중독 상태를 감출 수 있음이 인체의 특징이리라.

그런 의미에서 스스로가 중독자임을 밝히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남다른 시선으로 주목해야 한다. 그런 작가가 영국의 토마스 드 퀸시다. 1785년에 영국에서 태어난 약 200여 년 전의 인물이다. 이름에 ‘드’(de)가 붙은 것으로 그가 귀족가문 태생임을 알 수 있다. 귀족이면 어떻고, 노예면 어떠랴. 더 중요한 건 아편에 중독됐던 그가 이 중독의 문제점을 상세히 밝히고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아편의 위험성을 널리 알린 최초의 작가란 점이다. 당시는 아편의 중독성도 모른 채 많은 계층의 사람이 통증을 완화시키기 위해 쉽게 아편을 복용했고 그 결과 쉽게 중독이 됐던 시절이었다. 그의 고백에 귀 기울여 보자.

아편 복용 후 1시간이 지나자 찾아온 격변

1804년, 퀸시가 대학생이 된 19세 때 처음 아편을 복용하게 된 계기는 치통에서 연유했다. 그는 어릴 때부터 날마다 머리를 감는 습관을 가졌다. 하루는 치통이 심해 머리를 감지 않게 되자 스스로 나태해졌다는 생각에 자다 말고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찬물에 머리를 담근 후에 말리지 않은 채 다시 잠들었다. 다음날 아침엔 치아뿐 아니라 얼굴과 머리 전체에서 심한 통증을 느끼게 됐다. 퀸시의 이런 증상은 오늘날 진단 내리자면 안면 신경통이었을 것이다. 그는 이때부터 쉼 없는 통증을 20일간 겪었다. 21일이 되는 날 통증에서 도망가고 싶은 심정으로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거리로 뛰쳐나갔다. 그때 우연히 한 대학 친구를 만났는데 그가 아편을 소개했다. 퀸시도 아편이 암부로사라고 부르는 ‘신의 음식’이란 지식 정도는 갖고 있었지만 그것이 자신에게 해당되는 약인 줄은 몰랐다. 그는 별다른 생각 없이 비 내리는 옥스퍼드가(街)를 지나며 한 약국에 들렀다. 일요일에 근무 중인 약사는 따분한 표정으로 그에게 아무렇지 않게 아편을 건넸다. 퀸시가 1실링을 내자 반 페니 동전을 거슬러주며 알코올에 녹인 아편팅크를 준 것이다. 집에 돌아와 아편을 복용한지 한 시간이 지나자 퀸시에게 최고의 격변이 일어났다.

“가장 낮은 곳에서부터 내부의 영혼이 위로 치고 올라왔다. 나의 내부 세상이 드러났다! 고통이 사라진 것은 다른 문제였다. 고통은 내 앞에 열린 무한한 긍정적인 결과에 완전히 가라앉아 사라졌다. 심연에 자리 잡은 신성하고 무한한 기쁨의 세계가 갑자기 드러났다. 아편은 모든 고통을 사라지게 만드는 만병통치약이었다. 철학자가 수 세기 동안 토론을 벌여왔던 행복의 비밀이 아편에 있었다.
이제 그 행복을 1페니로 사서 호주머니 안에 넣어 다닐 수 있게 됐다.”

시인의 딸이 죽자 다시 아편에 빠져

퀸시에게 케이트의 죽음은 비단 한 어린아이의 죽음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에게 신경쇠약 증상을 안겨줬다. 다시 아편을 입에 대기 시작하는 계기가 됐다. 그는 3주마다 아편을 복용하다가 1주일에 한 번씩으로 늘렸고 1813년엔 위장병이 심해져 거의 매일 복용했다. 1816년 그의 아편 복용량은 하루 320그레인 또는 8000드롭이었다. 1817∼1818년 또 1843년에 그의 중독은 최고조에 달해 하루에 480그레인 이상을 마셨다. 현대엔 20그레인을 복용해도 아편 중독자라고 정의하므로 퀸시가 도대체 어떻게 견뎠는지 불가능한 정도의 중독이었다. 그는 아편이 주는 ‘쾌락’과 ‘고통’을 따로따로 언급한다. 처음에 느꼈던 쾌락에 이어 끊지 않으면 죽을 것 같은 고통을 다시 느끼게 된 것이다. 특히 아편 때문에 지적 마비 상태를 겪어야 했다. 편지 한 장도 제대로 쓸 수 없고 답장 한 줄도 못하는 무기력한 상태에서 그는 환각을 겪었다. 어린 시절에 죽은 아이의 환시를 봤다. 머릿속에 갑자기 극장이 들어서서 조명이 켜지고 찬란한 밤의 장면이 연출되는 것이었다. 그의 두뇌는 꿈꾸면서도 우울을 느꼈고 공간 감각과 시간 감각이 엄청나게 손상됐다. 어린 시절의 사소한 사건과 잊었던 장면이 자주 되살아났다.

소설가가 경험 후 표현한 금단 증상

앤을 그리워하는 애틋한 꿈을 꾸기도 하지만 밤새도록 전투와 싸움, 고통이 이어지는 꿈도 꿨다. 꿈속에서 발생한 사건이 너무 힘든 나머지 아침에 일어나 다시는 잠들지 않겠다고 선언한 적도 있었다. 이렇게 꿈과 환각에 시달리며 아편의 문제점을 확실히 느끼게 된 퀸시는 아편을 줄이고자 노력했다. 그는 아편을 끊으며 감내했던 금단 증상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모든 것에 짜증이 나고, 몸은 흥분됐다. 특히 위장이 예민해져서 쉴 새 없이 밤낮으로 통증이 계속되고 잠은 24시간 가운데 단지 3시간 밖에 못 잤다. 신경이 매우 예민해져 잠들지 못하는 동안 세상의 모든 소리가 다 들렸다. 턱 아래가 계속 부풀어 오르고 입엔 궤양이 생겼다. 언급하기조차 싫은 증상이 나타났다. 아편을 끊으려할 때 반드시 동반되는 귀찮은 증상 중 하나가 바로 격렬한 재채기다. 매우 고통스런 이 재채기는 한번 시작하면 두 시간은 계속 됐다. 이 재채기의 발작을 하루에 두 세 번씩 겪었다. 숨을 쉴 때마다 역겨운 메스꺼움이 동반됐고 식욕ᆞ소화기능이 통째로 망가졌다.”

아우구스티누스나 루소의 ‘고백록’을 본 따

이렇게 금단현상이 혹독했지만 퀸시는 마약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를 여러 차례 했다. 더욱이 아이가 생겨 결혼을 하고 나니 가족을 부양해야 할 의무가 커졌다. 1818년부터 3년간 그는 하루에 300드롭으로 아편을 줄여가며 신문사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그는 지난 6년간 아편 때문에 글을 쓸 수 없었던 점을 상기하며 아편 중독의 경험이 의미 있는 기사거리가 될 것으로 예상했다. 먼저 잡지에 연재한 후에 ‘어느 영국인 아편중독자의 고백’을 책으로 펴낸 것은 1821년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이나 장자크 루소의 ‘고백록’처럼 솔직하게 자신을 드러내겠다는 마음으로, ‘고백록’이란 이름을 붙였다. 자신의 도덕적 타락이나 상처를 거리낌 없이 타인의 눈앞에 드러내어 지금까지 예가 없고 앞으로도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글을 쓰겠다고 그는 결심했다. 한 사람의 인간을 완전히 그리고 포장 없이 보여주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그는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아편을 복용하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이 완벽하다고 말할 순 없지만 출판 후 세간의 폭발적인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그는 한 평생 궁핍했는데 부양할 자식이 7명이나 있었으며 몇 차례나 부채 때문에 고소를 당하기도 했다. 당시 드 퀸시는 모두가 인정하는 괴짜로 차와 몇 톨의 쌀, 고기 부스러기로 연명했다. 먼지 가득한 방엔 서류가 높이 쌓여 있었다. 밤새 산책하고 낮엔 종일 잠을 자는 이상한 생활 패턴의 말라깽이 인물이었다.

그와 이야기를 나눠 본 사람은 드 퀸시가 자상한 아버지이자 친구이며 멋진 달변가임을 기억하고 있다. 그는 동시대인에게 모순으로 가득 찬 사람으로 비쳐졌다. 여린 마음을 지녔지만, 공포ᆞ살인ᆞ음모와 같이 무시무시한 일에 관심이 많았다. 말은 정중하게 했지만 글은 무례하거나 악의 있게 썼다. 겉으론 성깔이 있으나 속마음은 매우 착한 사람이었다. 그는 그렇게 그의 세기를 살다 갔다.

후세의 평론가들이 자서전의 문체를 완성시켰다고 높이 평가하는 드 퀸시는 한평생 마약의 굴레 속에서 힘겹게 신음했던 사람이다. 그는 고백론이 예상외의 판매량을 기록하자 이 고백을 마무리 짓는 후속편을 더 쓰겠다고 했으나 끝내 약속을 이행하지 못했다. 만일 퀸시가 아편을 시작하지 않았다면 어릴 적부터 보여주었던 상상력이나 탁월한 그리스어 실력 등의 문학적 재능으로 미루어 인류사에 더 큰 공헌을 남겼으리란 추측이 가능하다. 스스로도 “나와 같은 이성적인 존재가 어떻게 이런 불행의 멍에를 짊어질 수 있었을까?”라고 한탄을 했으므로.......

예술과 마약의 관계

대학시절 필자는 가수 조○○을 좋아했다. 나중에 그가 대마초에 연루돼 방송 출연을 못하게 됐을 때 상당히 실망했다. 노래 뿐 아니라 연주ᆞ작곡까지 하며 남다른 노력을 한 인기가수가 공인으로서의 책임감을 외면한 채 대마초를 피웠다니 서운하기도 하고 괘씸하기도 했었다. 일부에선 예술가로서의 삶이 얼마나 힘들면 마약에 손을 댔으랴 하는 동정의 시각이 있었다. 다른 일부에선 대마초를 피우고 공연하면 더욱 예술적 완성도가 높아진다는 점을 들어 지나친 팬 서비스의 일환으로 이해하려는 시각도 있었다.

드 퀸시의 ‘고백론’을 읽다보면 이런 연예인의 애환도 이해가 될 것 같다. 퀸시는 처음 치통 때문에 아편을 접했다가 아편의 장점과 매력에 푹 빠진다. 퀸시 자신도 그 상황을 기꺼이 아편의 쾌락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곧 그 쾌락이 고통으로 연결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아편에 탐닉해 있는 동안 그는 제대로 된 일상의 삶을 살아갈 수 없이 환각과 꿈에 사로잡혀 지낸다. 이런 폐단을 깨달은 후 아편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하자 이번엔 금단증상이 또 다른 얼굴의 고통으로 다가온다. 이렇게 쾌락ᆞ고통ᆞ금단증상을 반복하는 것이 퀸시가 증언한 의학적인 마약의 경험이다. 세상에 마약 중독자가 많은데도 고백론이 흔치 않은 것은 퀸시와 같은 글솜씨를 가진 사람이 드물기 때문일 것이다. 퀸시의 아편중독자 고백론이 가치 있게 평가되는 이유는 그의 진정성이 담긴 탁월한 문체도 있지만 후세 사람에게 아편의 위험을 널리 알린 공로가 있기 때문이다. 퀸시가 무척 존경했던 윌리엄 워즈워드가 그의 문학적 재능을 알면서도 퀸시를 멀리한 건 마약중독자였기 때문이다. 스포츠 대회에서 신기록을 세워도 도핑검사 결과 약물이 검출되면 취소되듯이 작가가 예술혼을 불사르려는 노력으로 아편을 복용했다면 제 아무리 좋은 작품이라도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왜 이렇듯 인류 역사엔 마약의 유혹에 나약한 사람이 생기는 건지 안타까운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만일 퀸시의 이 작품을 읽지 않았다면 필자는 마약중독 환자를 이해하려는 일말의 노력 대신에 먼저 경멸부터 했을 것 같다. 마약 중독자에게 갱생의 기회를 주려면 마약에 대한 심리학적인 측면도 잘 알아야하기에 ‘어느 영국인 아편 중독자의 고백론’을 더 눈여겨보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