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도하고 싶다. 회복을 위한 끊임없는 노력뿐 -임 광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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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생활이 힘들다고 약물을 선택했고, 행복은 없다고 부정적으로 생각하면서 또 약물을 선택했다. 나는 타락의 길로 물들이고 있었다. 이 글을 쓰면서 이런 생활들로 나의 일생의 절반 이상을 허비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린 시절부터 청소년 시절까지 경제적으로 덜 어렵고 보다 화목한 가정에서 생활했더라면 지금의 나의 모습이 아닌 일반인처럼 평범한 생활을 했겠다고 생각도 해본다. 그러나 내가 잘못한 선택으로 지금의 내 모습인 것은 명백하다. 누구의 책임도 아니다. 오직 내가 잘못 결정한 행동 때문이다.
약물을 오랜 세월 하다보면 뇌가 변해 언어장애와 판단력 저하, 부정적인 사고방식으로 전환되는 등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하지 못하게 되어 결국 병원이나 교도소에서 평생을 보내야 한다. 하지만 도움을 받아 단약을 하겠다는 동기를 갖고 함께 회복을 위해 노력한다면 부모께 효도하고 사회에도 작게나마 이바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흡입제의 구렁텅이로 빨려 들어가다.
산천초목이 우거진 시골마을에서 2남1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모님은 인삼농사를 지으셨다. 내가 3살 때, 농사일을 중단하시고는 근처의 중소도시로 이사하였다. 아마도 경제적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때, 부모님은 나를 큰 집에 떼어 놓았다. 어린 나이에 부모님과 떨어진 나는 너무 충격을 받았나보다. 큰집 식구들과 생활하면서 하루가 멀다 하고 매를 맞은 기억밖에 없다. 아마도 부모님께 보내달라고 울고불고 했던 것 같다. 눈물이 마른 날이 없었다.
이렇게 살았던 3개월이 지금도 잊히지 않은 것을 보면 정말로 악몽이었던 것 같다.
중소도시에서 부모님은 행상으로 야채장사를 했다. 그러나 그곳에서의 생활은 매우 어려웠다. 할머니가 나를 돌보았다. 나는 할머니를 따라 절에 많이 갔다. 할머니께서 불공을 드린 후 과일이나 떡을 먹는 재미로 절에 따라 간 것이다.
부모님은 장사경험이 없어서인지 결국 장사도 그만두게 되었다. 경제적 어려움은 가정에 큰 고통을 주었다. 부모님은 다시 수도권으로 이사했다. 이곳에서의 생활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유치원을 다니지 못했다. 한글을 배우지 못했던 나는 초등학교에 입학해서는 학업성적이 계속 뒤쳐졌다. 나름대로는 열심히 공부도 했으나 그 격차는 좁혀지지 않았다. 그렇게 초등학교 6학년이 되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같은 반 친구가 학교를 잘 나오지 않았다. 담임선생님께서 나에게 그 친구를 학교에 데려오도록 하였다. 나는 그 친구를 찾아 함께 학교에 왔다. 어떤 때는 집에 없어 찾으러 온 동네를 돌아다니기도 했다.
그 친구는 동네에서 나쁜 아이로 소문나 있었다. 그 친구와 함께 하는 시간이 많을수록 그 친구가 하는 행동들을 따라하게 되었다. 그 친구는 그 때 본드도 하였다.
본드를 하던 그 친구에게 하는 이유를 물어보게 되었다. 그 친구는 “이것을 하면 기분이 좋아지고 세상에서 자기가 최고로 느껴진다.”고 하면서 유혹하였다.
점점 그 친구의 말에 호감을 갖게 되어 처음으로 해보았지만 기분이 좋아지는 것이 아니라 머리만 아팠고 구토를 하였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아마도 그 아이와의 친구관계 때문일 것이다.) 그런 고통을 느끼면서도 또다시 손을 대고 흡입을 하고 있었다. 결국 초등학교 6학년 겨울방학 때는 흡입제를 입에 달고 살았다.

중단, 그리고 다시 손대다.
흡입제에 취한 추한 모습으로 집에 들어가면 어머니는 늘 걱정하면서 가슴을 잡고는 항상 위로해주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말씀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계속 흡입제의 구렁텅이로 빨려 들어갔다. 어느 날, 어머니는 내가 흡입제를 하는 것을 보시고는 내 앞에서 쓰러졌다. 그 순간, 나는 흡입제를 부는 것이 나쁜 것이라고 깨닫고는 사용을 중단하였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들어가서는 못다 한 공부를 열심히 하여 좋은 아들로 효도하고 싶었다. 그러나 노력을 해도 공부가 잘 되지는 않았다. 흡입제를 하지 않겠다는 생각에도 점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중학교 2학년 때, 또 다시 동네 친구들과 함께 흡입제를 손대게 되었다. 그 일로 내 인생은 파멸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교도소를 전전하며 17년의 세월을 보내다.
중학교 때, 교도소라는 곳을 처음으로 견학하면서 법을 어기면 이런 곳에서 생활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교도소가 무서운 곳이라고 인식하면서도 흡입제를 계속 사용했다. 어느 날, 한 친구의 부모님이 모두 여행을 간다고 하여 친구 4명이 그 친구 집에서 밤늦게 까지 술을 마시면서 놀았다. 갑자기 그 친구의 부모님이 돌아오시는 바람에 급하게 빠져나왔다. 한 친구가 흡입제를 구해 놓은 것이 있다고 하여 인근 지하실로 갔다. 친구들과 밤새 불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몰랐던 우리는 그 지하 창고 주인에게 발견되어 파출소로 가게 되었다. 파출소에서 1차 조사를 받고는 경찰서로 인계되어 유치장에 갇히게 되었다. 그 때 정말로 지옥에 온 기분이었다. 울면서 경찰관에게 호소해보았지만 이전에 기소유예처분을 받은 적이 있던 나에게 구속영장이 떨어졌다. 결국 내가 견학했던 교도소에 직접 들어가게 되었다. 이때가 내 나이 16살이었다.
다행히 부모님이 적극 도와주어 보석으로 석방되었다. 담임선생님의 선처로, 겨울방학동안 매일 학교에 반성문을 제출하고 교실을 청소하였다. 그리고 중학교를 무사히 졸업하게 되었다. 이렇게 반성활동을 하면서 다시는 약물을 하지 않겠다고 결심하였다. 금보석 상태에서의 재판에서 징역 8월에 집행유예 2년 형을 선고받고 귀가하였지만 이 형벌이 나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잘 몰랐다.
실업계고등학교에 진학하여 생활하던 1학년 여름 즈음에 친구의 유혹에 또 넘어갔다. 다시 구치소에 수감되어 재판을 받았다. 함께 했던 친구들은 모두 집행유예로 나왔지만 나는 집행유예기간이서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항소하여 사회봉사명령 120시간을 받고 사회로 나오게 되었다.
고등학교는 다시 다닐 수 없었다. 보호관찰소에 신고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어린 나에게 사회생활은 너무 힘들었다. 무엇을 해야 할지를 모르는 상태에서 고민만 하였다. 부모님은 가구공장에서 가구를 만드는 일을 배워보라고 하였다. 난생 처음 공장 생활은 매우 힘들었지만 돈에 대해 조금은 알게 되었다. 그러나 약물후유증 때문인지 대인관계도 잘 하지 못했고, 일에 집중하지도 못했고, 약물생각만 머리에 맴돌 뿐이었다. 결국 다니던 회사도 그만두고 다시 약물을 사용하였다.
이와 같이 점점 다양한 약물을 사용하여 교도소에서 17년이라는 세월을 보냈다. 출소할 때면, 단약에 성공해야겠다고 결심하지만 행동으로 실천하지 못했다. 그래서 교도소와 치료감호소를 돌아다니는 삶을 살았다. 나는 나 때문에 전전긍긍하면서 마음고생, 몸 고생하시는 부모님에 대한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고, 늘 불평불만만 하는 사람으로 변해갔다. 오직 내 자신의 쾌락만을 쫓아 생활했다. 또한 늘 부정적인 생각으로 꽉 차있어, 다른 사람들은 내 말을 신뢰하지 않았고 결국 나는 외톨이로 주의 시선들이 무섭게만 느껴졌다. 피해망상증으로 악화되어갔다. 약물을 오래 하다 보니 맛(미각)을 잃어버렸고 언어장애와 판단력이 떨어졌으며 항상 부정적인 사고방식으로 바뀌어 정상적인 사회생활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내 자신 스스로가 이 병을 고치기 위하여 치료감호소에서 배운 교육내용을 실천하다보니 많이 호전되었던 적도 있었다.

효도하기 위해 단약을 하다.
이런 내가 지난 5월 교도소에서 나오면서, 부모님께 효도하면서 일생을 행복하게 살기 위해 단약을 해야겠다는 굳은 결심을 하게 되었다. 교도소생활 때문에 아버지의 환갑잔치도, 누나의 결혼식도 참석하지 못하는 등 아들로써 제 역할을 제대로 해 본 적이 없었다. 이렇게 부모님께 불효만 한 것들을 생각해서라도 단약에 꼭 성공하여 효도하는 아들이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 전에도 한국마약퇴치운동본부에서 개최되는 NA모임에도 여러 번 참석했었지만 단약을 유지하지 못했고 사회에서 직장생활도 짧게나마 해본 적도 있지만 내 몸과 마음이 사회에 적응하지 못했다. 오히려 스트레스만 쌓여 결국 다시 약물을 하게 되어 다시 교정시설에 입소와 퇴소를 반복하였다.
하지만 이번만은 나의 인생에서 마지막 기회라는 심정으로 직접 송천재활센터를 찾았다.
나는 이곳에서 마약교육을 받으면서 회복을 위해 노력하는 많은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내 자신을 뒤돌아본다. 내 자신이 스스로 조금씩 변해가는 모습에 희망을 갖는다. 교육프로그램을 통해 나도 충분히 단약에 성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나는 약물을 만나면서 정말로 많은 것을 잃었다. 주위 사람들로부터 신뢰도 받지 못했다. 능력도 없는 사람으로만 생각했었다. 그러나 송천재활센터에서 배운 것을 실천하면서 생활하다보니, 나에게도 많은 가능성이 있고 재능도 있음을 알게 되었다. 또한 부모님들도 나를 새롭게 대해주는 모습에서 감사함이 나를 전율하게 하였다.
지금 모든 것이 감사할 뿐이다. 단약을 유지하면서 사회생활을 열심히 한다면 나에게 행복과 평온함이 깃들 것이라고 믿고 있다. 나는 끊임없이 노력할 뿐이다.
마지막으로 송천재활센터 식구들과 항상 우리들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주고 있는 한국마약퇴치운동본부 임직원 여러분께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또한 주위에서 나를 걱정해 주는 모든 분들을 위해서도 그리고 더 나아가 내 자신을 위해서도 단약에 성공하여 주위 모든 사람들에게 보답하는 사람으로 거듭 태어나겠다.
흡입제로 고통을 받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하루 빨리 스스로의 단약의 길을 잘 찾아 실천하여 행복하고 즐거운 생활을 할 수 있도록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