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에서 일어나 희망을 외치다 -표 기 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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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3g의 유혹
90년대 후반, 왠지 모를 음산한 기운이 감도는 초겨울의 어느 날.
내가 모시고 있는 선배님이 일이 조금 있다며 창고로 밤 11시경 호출을 했다. 선배의 창고는 후미진 시장 골목 안쪽에 자리한 허름한 2층짜리 조립식 건물이었다. 어둠이 짙게 깔리면 등줄기까지 오싹하게 하는 미묘한 기운이 흐르는 곳---- 그날따라 유난히 초겨울의 황량한 바람이 불고, 비마저 부슬부슬 내리는 것이 공포영화의 한 장면처럼 다가왔다.
창고 문을 열고 들어서자 먼저 자욱한 담배연기가 눈을 찌푸리게 했다. 시장 상인들이 이곳저곳 삼삼오오 원탁에 둘러 모여 포커게임을 하고 있었고, 사무실에서 나온 선배는 조그마한 화장품 하나를 주시면서 ◯◯동 사거리에 차를 정차하고 비상 깜박이를 켜고 있으면 검은색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다가올 것이라 했다. 그리고 그 여자에게 물건을 전해준 후 친구들 하고 술 한 잔 하라며 용돈 10만원을 주셨다. 그렇게 몇 번을 심부름하며 용돈을 받아쓰던 어느 날, 쓸데없는 호기심이 생겼다.
며칠 멀다하고 화장품을 받는 그녀, 간단한 심부름의 대가치고는 두둑한 용돈, 그리고 화장품 통 안의 내용물----
그런 호기심의 유혹으로 인하여 알아서는 안 되는 것을 알아버렸고,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고 말았다. 화장품 게이스 안의 비밀은 다름 아닌 백색가루와 주사기 --- 마약이었다. 순간 머릿속의 회로는 마구잡이로 뒤엉켜 버렸고 내 몸은 이미 경직되어 버렸다. 마약중독 증세로 환청에 시달리다 그만 4층에서 뛰어내려 추락사한 선배의 49제가 끝난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애써 내 눈앞에 펼쳐진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부정하면 할수록 피하면 피할수록, 머릿속이 혼란스러웠고 내 앞의 현실을 내 힘으로 바꿀 수도 없었다.
그렇게 혼란스러운 시간이 흐른 며칠 후...
그날 저녁 역시 선배님의 호출을 받고 그녀에게 물건을 전해주기 위해 사거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나보다 너댓살 위쯤 되어 보였고, 긴 생머리에 언제나 좋은 향수 냄새를 풍겼다. 그녀는 술에 약간 취한 듯 조금 흔들리는 모습으로 건널목을 걸어와 창을 두드렸다. 창문을 내리자 그녀는 내일부터 일주일간 휴가라며 술이나 한잔 하자고 말했다. 별로 특별히 할 일도 없고 무료한 터라 그녀와 함께 했다. 조금씩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술병이 하나둘씩 쌓여갔고 취기 때문에 눈의 초점도 흐려져 갔다. 그녀를 집에 데려다 주고 돌아서려는 순간 커피 한 잔을 권했다. 싫지 않았다. 그녀와 방안에 마주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중에 그녀가 싱크대에서 무언가를 꺼내왔다. 그것은 주사기와 증류수 그리고 약이었다.
순간 어안이 벙벙하고 당혹스러움을 금치 못하고 안절부절 하는 나를 보고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주사기 하나를 건넸다. 난 주사기를 손에 들고 순간 많은 것을 생각했다.
‘약과 건달은 필연적인 함수관계다.’라고 이미 비겁한 변명의 정의를 내리고 건달의 과시욕, 허영심에 사로잡혀 어느덧 주사바늘은 혈관을 향했다.
약이 혈관을 타고 흐르는 순간 온 몸이 뜨겁고 허공 위를 나는 듯 깃털처럼 몸이 가벼웠다. 그리고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원초적 본능에 충실했다.
나는 그렇게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형용할 수 없는 이상한 기류에 휩싸여 젖어갔고 그녀와 자주 주사기 파트너가 되었다. 그리고 시간이 조금 지나 당연한 수순을 밟듯 마약류관리에 관한 법률 위반이라는 죄명으로 처음으로 두 손에 차가운 은팔찌가 채워졌다.

사랑 그리고 후회
어릴 적부터 공부보다는 주먹을 쓰는 것을 더 잘했던 나는 조직이라는 울타리에 들어가 못된 수업을 받으며 살았다.
자유와 방종의 차이도 모른 채 내 멋대로 세상을 살았고 오직 철저히 편협한 신념과 시선으로 이기적인 삶을 사는 부류였다. 이런 부류의 인간에게는 공통된 분모가 있다.
이익을 보면 달려들고, 맛있는 음식이나 물건을 보면 탐욕이 생기고, 어리석은 사람이나 약자를 보면 속이고 괴롭히며, 미인을 보면 애정보다는 욕정을 느끼며 사랑하기보다는 자신의 전유물로 만들고 싶어 하는.... 그게 흔히들 얘기하는 못된 놈들의 습성이다.
이런 내게도 운명 같은 여인이 등장했다.
영화에서처럼 첫눈에 반해서 심장이 빨리 뛰고 숨이 가파지는..... 그런 운명의 만남이었다. 며칠 동안 아니 몇 달 동안 자존심을 버리고 애정공세를 펼친 끝에 그녀 마음의 문을 열었다. 그녀는 피아노 강사였는데 그녀의 손가락이 피아노 건반을 누를 때면 천국의 계단을 걷는 듯 했다. 그렇게 둘이서 사랑을 키워가고 있을 때쯤 내 주위의 이상기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모시던 선배가 싸늘한 주검으로 내 앞에 나타났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술자리를 함께 했었는데 믿어지지가 않았다. 죽음의 사인은 약물 과다복용이었다. 참으로 망연자실할 뿐이었다. 세상이 허무하고 의욕도 없었다. 허망함을 잊고자 나는 어느새 습관처럼 약에 기댔다. 선배를 하늘나라로 데려간 그 몹쓸 것에 말이다. 약에 매일 젖어 있으면서 그녀와의 애정 전선도 금이 가기 시작했다.
어느 날인가. 약에 취해 방에 있는데 그녀가 어찌 알고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며칠 동안 먹지도 못하고 잠도 제대로 자지 않은 상태라 얼굴은 파리하고 해쓱해져 있었다. 처음 보는 낯선 광경에 몹시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던 그녀.... 욕을 하고 나무라기보다는 충고를, 따가운 시선보다는 안타까운 시선으로 나를 보았다. 그 동안 수많은 가면을 쓰고 그 가면에 숨기고 지내온 나로써는 그냥 욕이라도 시원하게 하는 편이 마음에 편할 것 같았다. 그 안쓰러운 시선과 설교하는 말투.... 정말이지 받아 낼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마음에 있지도 않은 온갖 쌍소리와 그냥 내 전유물인양 취급해 버렸다.
그녀가 충고한 것을 약을 한 내가 아니라 그 약이었는데 말이다. 바보같이 약에 취해 그것도 구별하지 못하고 충고가 무엇인지 비난이 무엇인지 모른 채 칭찬은 속삭임처럼 듣고 충고의 부정적인 말은 천둥처럼 듣는 내 못된 습성을 드러내고 말았다. 그렇게 약 때문에 사랑했던 사람, 운명 같은 내 사랑을 아프게 하고 다시 8년 만에 자유를 박탈당하고 법의 심판을 받아야 했다.

마약과의 사투
마약이란 것 때문에 참으로 많은 것을 차츰차츰 잃게 되었다. 건강, 명예, 사랑, 돈 ......
동서고금의 대표적 명언으로
‘재물을 잃으면 인생의 일부를 잃는 것이요.
명예를 잃으면 인생의 전반을 잃은 것이요.
건강을 잃으면 인생의 전부를 잃는 것이다.‘란 말이 있다.
건강은 명예와 돈을 능가하는 삶의 결정인데 그것을 알았을 땐 이미 건강을 쾌락과 맞바꾼 상태였다.
선배들에게 차츰 신임도 잃어가고 속된 말로 약쟁이로 전락하고 있었다.
한번은 약에 취해 아버지 기일에 참석하지 못한 적도 있었다. 인생의 가장 밑바닥까지 보여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사랑이란 이름으로 내 곁을 떠나지 않고 예전과 같은 따뜻한 시선으로 마음을 닫지 않았다.
어느 날 그녀가 함께 여행을 가자고 했다.
약이 없어도 될 만큼 몸과 마음이 건강해져서 돌아오자고 하면서 말이다.
여자란, 참으로 묘한 존재인 것 같다.
잡으려면 도망가고 놓으면 다가오는 고양이 같기도 하고, 사랑에 모든 것을 불태울 수 있는 세상에서 가장 열정적인 것 또한 여자인 것 같다.
쉬고 싶었다. 기대고 싶었다. 따뜻한 그녀의 품안에서...
그렇게 그녀와 난 돌아올 기약을 정해놓지 않고 제주도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다. 매혹적인 하늘색 빛깔로 반짝이는 바다, 비릿한 바다의 갯내음, 그 냄새를 따라 걸으면서 그 동안의 아픈 상처의 실타래를 풀어놓고 서로의 상처를 보다듬어 주었다.
그녀는 내가 곁에 없는 동안 ‘오카리나’란 악기를 배웠다며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조그마한 크기에 그것을 입에 대고 영화 ‘타이타닉’의 주제곡을 들려주는데 따뜻하고 깊이 있는 음색의 선율에 내 마음이 평온을 찾은 듯 했다.
하지만 평온한 기류도 잠시, 보름쯤 시간이 흐르자 몸이 사시나무 떨듯 떨리고 누군가 망치로 머리를 때리는 것처럼 머리가 아프고 걸어 다닐 수 없을 정도의 아픔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내가 아니었다. 내 안에 누군가 또 있는 듯 했다.
결국 난 환영 속에서의 나를 보고 자해를 하며 의식을 잃은 사태까지 갔다.
바보처럼 주사기 하나에 모든 것을 잃고 그녀에게 또다시 보여서는 안 될 비참함을 보여주었다. 돌아올 비난을 감당할 자신도 없으면서.......

마지막이라면
지금의 난 6월의 따사한 햇살을 받으며 또다시 창살 안에 갇혀있다. 햇살은 생명을 지난 모든 것의 뿌리까지 파고들어 온 대기자 생명의 물결로 넘실거리게 만들고 있다. 나에게도 햇살 같았던 그 사랑밖에 모르던 사람....
사회가 나에게 면죄부를 주고 하늘이 마지막으로 욕심을 한번 부리라고 허락한다면 평생을 그녀와 함께 하고 싶다.
무수히 많은 가면을 쓰고, 숨기면서 지금까지 살아온 나이지만 아직 젊고 많은 날들이 남아 있기에 사랑을 가르쳐 준 사람. 내 안의 나를 보게끔 해준 사람, 아름다운 선율로 잊고 살았던 평온함을 선물해준 사람... 그 사람에게 죄책감에 더 이상 고개 숙이지 않고 용서를 빌고 싶다.

이렇게 부끄러운 내 치부를 글 속에서나마 고백하는 것 혹시라도 몹쓸 호기심에 마약을 접하는 것은 얻는 것 없이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잃을 뿐이고, 몰라도 되는 것은 영원히 몰라도 된다고 꼭 알리고 싶기 때문이다.

백색가루의 유혹.....
그것은 단지 개인의 불행뿐 아니라, 내 가족, 주위의 사랑하는 모든 사람, 나아가 나라 전체를 병들게 하는 것이기에 그 유혹에 빠졌던 사람으로서 진심으로 뉘우치며, 다시는 그 어느 누구도 접해서는 안 될 것임을 글로나마 모두에게 경종을 알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