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살의 평범한 여자이고 싶다 - 박희진

  • 조회수 17378
내 머리 속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기억들이 이 글을 쓰면서 다시금 생각나게 한다. 왜? 어쩌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살아왔던 것인지. 죽음을 선택하고 싶었던 순간들이 다시금 떠오른다. 내가 아닌 존재로 살아왔던 지난 13년의 세월 속에 나는 모든 것을 잃어버리며 살아왔다. 가슴이 찢어질 정도로 아팠던 기억들, 하염없이 울었던 기억들, 나의 의지로 끊을 수 없었기에 몸부림치던 기억들…. 나는 여자이다. 그러기에 더욱 울어야했던 아픈 기억들의 흔적은 내 영혼을 무참히 짓밟았던 마약을 알게 된 순간부터 시작되었다. 나는 지극히 평범한 가정에 1남 1녀 중 막내딸로 태어났다. 초등학교를 다니던 시절엔 호기심도 많았고 궁금한 것도 많았던 그런 평범한 아이였는데, 마약의 수렁에 빠지기 시작한 것은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비롯되었다. 처음부터 내가 원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 학교에서 일명 논다는 애들, 곧‘날라리’라고 불리는 아이들과 어울리게 되면서 부터였다. 그 아이들이 하는 것은 자의든 타의든 함께 하게 되었다.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담배를 피우게 되었고, 본드와 가스라는 것을 접하게 되었다. 한 두 번의 경험이 어느 덧 중독으로 이어졌고 점점 약물이라는 놀이에 나도 모르게 깊이깊이 빠져 들어가고 있었다. 그 당시 우리 가정은 아무런 문제도 없었던 평범한 가정이었다. 그저 그 아이들과 다른 세상을 경험하는 놀이에 이유 없이 빠져있었고, 함께 하는 것이 모두 신기했을 뿐이다. 그 때만해도 중독이라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그런 시기였다. 그러나 세월이 많이 흐른 후 중독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삶을 통해서 깨닫게 되었다. 하고 싶은 것도 많았고 욕심도 많았던 나는 넉넉지 못한 형편에 나의 욕구를 채워주지 못했던 부모님을 원망하기 시작했다. 그 후 부모님을 핑계로 가출을 하게 되었고, 잦은 가출은 고등학교를 진학하고 나서도 계속 되었다. 결국 가출이 문제가 되어 고등학교를 얼마 다니지 못하고 퇴학을 당하면서 더 깊은 수렁에 빠져들게 되었다. 학교를 그만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밤거리를 배회하며 본드와 가스를 하는 것뿐이었고, 그 후 친구의 소개로 밤업소에 들어가 밤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평범하던 우리 가정도 어려움을 겪게 되었고, 가족을 떠나 있었지만 가족의 생계만은 책임져야 한다는 마음으로 밤 생활을 시작했는데, 나는 그 곳에서 전혀 본적도 없는 새로운 약물을 접하게 되었다. 그 마약은 누바인이라는 약물이었다. 주사기를 사용해 누바인을 투약하는 언니들이 이상하고 징그럽게만 보였고, 나는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는 마음으로 그것을 멀리했고, 그 언니들을 상대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러던 나에게 본드와 가스를 알게 된 후 가장 먼저 자연스럽게 아무런 거부감 없이 다가온 약물은 일명‘땅콩’이라는 약이었다. 처음 사용했을 때는 세상이 아름다워 보이고 내 자신이 선해지는 것을 느꼈으나, 약이 떨어지면 내가 보았던 세상은 지옥으로 변해 있었고, 나는 점점 예민해져 가고 있었다. 밤 생활에서 접하게 된 땅콩을 시작으로 나는 대마초류도 알게 되었고, 대마초와 땅콩(화이트킹)을 함께 하는날에는 세상에서 그것만큼 기분 좋은 것이 내겐 없었기에 나는 점점 더 깊은 마약의 수렁에 빠져들어 가고 있었다. 그런 약물은 나에게 세상 모든 걱정과 근심을 없애주고 즐거움만을 가져다주는 것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기에 나는 멈출 수 없었고, 밤 생활에 대한 힘겨움과 수치감을 떨쳐버릴 수 있었기에 오히려 더욱 더 깊이 빠져가고 있을 그 무렵, 내가 상대하지도 쳐다보지도 않았던 날부핀이라는 마약에도 손을 대게되었다. 날부핀을 하게 되면서 내 팔에는 주사바늘 자국이 생기기 시작했고, 어느 날 손님이 그런 내 팔에 주사 바늘 자국을 보더니 필로폰을 하냐고 물어보면서 나에게 필로폰을 권하였다. 필로폰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를 들어서 알고 있었고 두려움도 있었지만 호기심 때문에 하게 되었고, 내가 지금까지 해왔던 그런 약물보다 더 크고 강하게 뇌를 자극해 오는 것을 느꼈다. 그 후 알고 지내는 오빠에게 필로폰을 구해 매일 마약에 빠져 아무런 생각도 없이 살아왔고, 필로폰을 판매하는 서울 사람을 만나면서 더 깊은 마약 중독의 늪으로 빠져들어 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체, 내 몸속에 마약을 넣고 있었다. 그러던 중, 생각지도 못했던 일들이 나에게 일어나기 시작했다. 필로폰을 하는 것이 그다지 큰 범죄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 아니었기에 큰 문제가 될 것이 없을 것 같았는데, 잘 알고 지내는 사람의 신고로 검찰에 구속되었고 재판을 받게 되었다. 구속될 당시만 해도 내가 필로폰을 사용한 것에 대한 죄책감보다 그 사람에게 배신을 당하였다는 분노가 더 컸었다. 죄라는 것을 깊이 인식하지 못한 나는 재판을 받고 나와서도 필로폰을 다시 하게 되었고, 그것이 훗날 내 인생에 있어서 고통과 슬픔과 지워버리고 싶은 기억으로 남게 될지 꿈에서 조차도 몰랐다. 단지 억울하다는 생각과 세상에 대한 두려움, 불평 그런 핑계들로 스스로를 마약의 포로로 몰아간 나는 철부지 바보였었다. 구속이 되면서 살이 많이 불었기에 나는 다시 살을 빼고 밤생활을 하게 되었고, 그 곳에서 사랑을 알게 되었다. 나에겐 첫 사랑이었고 진실로 사랑했던 사람이었지만, 그 사람은 내가 만나서는 안 될 사람이었다. 그것을 알면서도 나는 그 사람을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그 사람은 가정이 있는 유부남이었다. 그 사람을 만나는 동안은 필로폰을 그리 많이 사용하진 않았지만 완전히 중단한 것도 아니었기에, 그 사람이 모르게 마약을 사용하는 것이 너무나 미안했고, 필로폰을 구하기 위해서는 나에게 필로폰을 주는 남자들이 원하는 것은 내가 하기 싫어도 다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결국 필로폰을 멈추지 못했던 나는 집행유예로 사회에 나온 지 3개월 만에 또 다시 구속되고 말았다. 처음 구속되었을 당시와 마찬가지로 내가 잘못했다는 생각보다도 사랑하는 사람과 사회에 있는 가족들과 내가 하던 일에 대한 타격이 더욱 크다고 생각했기에 좌절했고 죽고만 싶었다. 3일 동안 자지도 먹지도 못하고 어떻게 하면 죽을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꽉 차 있었다. 그러다가 내 눈에 띈 것은 손목을 그을 수 있는 물건이었고, 화장실에 가서 손목을 그어봤지만 상처만 남고 동맥은 끊어지지 않았다. 자살의 실패 후 정신을 차린 나는 이 난관을 어떻게 하면 극복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잠들기도 했고 밥을 먹으면서 재판부에 탄원서를 한줄 한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같은 방 동료들은 동정심을 유발할 수 있도록 불쌍한 처지를 쓰라고 했지만, 나는 거짓말까지 하면서 나의 죄를 삭감 받고 싶진 않았기에 진실로 내 마음을 호소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구속 된지 한 달 만에 내가 감당하기엔 너무나 견디기 힘든 일이 다가왔다. 임신을 하게 된 것이었다. 책임지지 못할 일이었고 너무나 힘든 상황에서 일어난 일이었기에 또 다시 좌 절의 늪으로 빠져들어 갈 수밖에 없었고, 1심 재판에서 2년이라는 실형을 선고받았다. 나는 항소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내게 고통의 무게가 너무나 컸던 탓인지 양수가 터져서 항소를 뒤 로하고 형 집행정지를 받고 아이를 출산하러 사회로 나가게 되었다. 아이를 출산하러 사회에 나가 지옥 같은 그 곳으로 다시는 가고 싶지 않은 마음에 도망이라도 치고 싶었지만, 내가 지은 죄를 비로소 깨달으며 스스로 감당하리라 다짐하였다. 나는 항소심 재판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벌금형으로 다시금 새출발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고, 사회로 돌아온 나는 한 동안 열심히 살아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매일 반복되는 가정의 불화와 밤 생활의 염증을 느낀 나에게 마약은 달콤한 유혹으로 다가왔고, 다시금 필로폰에 손을 댄 나는 또 다시 구속되고 말았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었다. 이번에는 마지막이라고, 아니 평생 뽕쟁이로 살아야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하나님이라는 존재에 대해서도 원망을 했다. 신이시여 진정 당신이 살아 계시다면 한번만 더 기회를 달라고…. 그 후 재판과정에서 다른 동료들도 놀라고 나 역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내가 또 다시 집행유예로 사회로 돌아오게 되었던 것이다.‘ 자기 버릇 개 못 준다’고 했던가? 필로폰은 마치 나에게 습관처럼 몸에 배어 있었고 내 생활에 일부분이 되어 있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은 출소 후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그 이유를 왜‘마약은 단 한번이라도 하면 안 된다’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방황을 거듭하던 나는 어느 날 마약을 함께 하던 친구의 손에 이끌리어 당시 마약퇴치운동본부에서 근무하던 성윤이 오빠를 만나게 되었고, 함께 자리했던 신 목사님을 만나서 많은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나와 같은 중독자이셨던 그 분이 이제는 하나님의 종으로 살아가신다는 말에 처음에는 그리 큰 감흥을 받지 못했었다. 그 만큼 나에겐 마약의 비중이 더 크게 느껴졌기 때 문이었다. 친구의 손에 이끌리어 한두 번 예배를 드리게 되었고, 차차 내 마음은 안정을 찾는 듯 했으나 마약에 대한 강한 유혹만은 도저히 뿌리칠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그 친구가 구속되었고, 신 목사님께서 너마저 그렇게 되면 안 된다고 하시며 목사님 댁에서 함께 치료해 나가자고 하셨다. 나는 목사님 댁에서 기거하면서 예배도 드리고 하나님을 알아가면서 은혜 체험도 하게 되었다. 이것은 정말 놀라운 체험이었다. 필로폰을 몸에 넣었을 때보다 은혜의 체험은 나에게 정말 큰 기쁨과 행복을 가져다주었다. 매일매일 나는 약을 중단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자지게 되었고, 항상 어두운 세상만 보고 살았던 내가 빛으로 세상에 나올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다. 그 곳에서만난 마약을 했던 사람들이나 그의 가족들이 나와 같은 상처를 가진 사람이었기에 상처로 얼룩진 마음을 공유할 수 있었다. 세상에서 손가락질 받았던 내게 진심어린 사랑으로 다가오는 그들에게 마음을 열게 되었고, 함께 할 수 있게 되면서 나도 변해갔다. ‘소망을 나누는 사람들의 교회’에 나가면서 나는 잠시 마약을 중단 하게 되었다. 살아오면서 처음 하나님을 진심으로 만났던 나에겐 은혜란 이루 말 할 수 없이 큰 기쁨이었고,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갖게 되었다. 그렇게 신앙을 갖게 되면서 조금씩 안정을 찾아갔지만, 나는 또 다시 마약의 유혹에 빠지고 말았다. 그러나 그 때 마약의 경험은 즐거움이나 현실에서 도피할 수 있다는 마음보다 더 큰 두려움과 고통을 가져다주는 경험이었고, 업소에 나가 돈을 벌기 위해 졸음을 참기 위해 마약을 할 수밖에 없었다. 비록 약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나였지만, 나의 의지로 힘으로 안 된다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께 정말 간절히 기도했다. “주여, 당신의 사랑하는 딸이 마약으로 인해 많은 것을 잃어버렸고, 이제는 마약을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사오니 저를 도와주소서!”눈물로 기도했다. 믿지 않은 사람들은 우연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난 다시 놀라운 은혜 체험과 동시에 마약을 중단하게 되었다. 마약을 함께 하던 사람들과의 연락을 끊은 체 매일 매일 공동체의 가족들과 보내면서 회복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신 목사님의 말씀처럼 지금도 난 완전히 마약을 끊은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중단하고 있을 뿐이며, 회복자의 삶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뿐일 것이다. 마약과의 길고 힘든 투쟁은 내가 저 하늘나라로 갈 때까지 계속되겠지만, 나는 마약중독자라는 멍에를 안고 평생 살아가야 할 것 같다. 장애인들은 그들을 비장애인들과 똑 같이 바라봐 주길 원할 것이다. 나도 마약중독자가 아닌 30살의 평범한 여자로 불리며 살아가고 싶다. 물론 지금은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나이기에, 내가 항상 바라던 삶을 살고 있는 나는 행복하다. 과거에 마약을 했다고 해서 패배자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지만 이 땅에 마약 때문에 고통하고 신음하는 사람들을 보게 되면 너무나 가슴이 아파온다. 그리고 지금도 어두운 곳에서 마약으로 인해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젠 말하고 싶다. “어두운 곳에 있지 말고 밝은 곳으로 나오라”고. 또한 우리사회의 청소년들에게 한마디 하고 싶다. “마약은 그 어떤 호기심에서라도 단 한번도 해서는 안 된다”고…. 나는 지금 많이 회복돼 있다. 소망을 나누는 사람들의 가족이 된지도 벌써 4년의 세월이 흘렀다. 나를 이렇게 변화시켜준 하나님과 신 목사님, 그리고 공동체 가족들에게 감사드린다. <2006 한국마약퇴치운동본부 발간 수기집 '후회와 눈물 그래도 희망이' 에서 발췌>